을유문화사판<제2의 성> 출간 소식을 듣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번역본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사실 이미 동서문화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이 있기에 '드디어'라고 함으로써 마치 최초 번역본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동서문화사에서 세계사상전집 시리즈로 나온 번역본들에 대한 평가를 고려하면, '드디어'라는 표현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닐 것이다. 동서문화사 관계자 여러분과 동서문화사 책의 번역자 분들께는 정말로 죄송한 얘기지만,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선집은 대체로 일본어판의 중역이고, 역자들 역시 대부분 그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며, 심지어 해적판이다라는 것이 중론이다(그러나 동서문화사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최고의 양서들을 저가에 보급해 온 점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어떤 책인가. 페미니즘의 고전 중의 고전, 현대 페미니즘의 모태, 여성학의 바이블로 평가받고 있는 책이 아닌가. 게다가 이번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번역본은 보부아르 연구로 파리 4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이 번역을 했고, 친절한 역주(나는 고전 번역본의 경우 역주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까지 내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최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할 계획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알라딘에 뜬 "[신간] 보부아르 연구자가 공들인 완역본, 을유문화사판 <제2의 성> 출간!"이라는 알림을 보고 기쁜 마음에 흥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불과 일주일 전에 동서문화사판 <제2의 성> 1권과 2권을 21,600원을 지불하고 구입했기 때문이다. 느낌이 싸하기는 했다. 최근 페미니즘 부흥이라 할 만큼 출판계에서는 수많은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 출간 및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 상황이고,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보부아르 책(레 망다랭, 아주 편안한 죽음, 작별의 의식)도 많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동서문화사판보다는 훨씬 더 좋은 <제2의 성> 번역본이 곧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동서문화사판을 사면서도 느낌이 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아내와 나는 새 번역본이 나온다고 해도 최소한 6개월은 더 걸릴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 고민 끝에 동서문화사판 <제2의 성>을 구입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올해 들어서만 벌써 세 번째다. 허리디스크로 앓아눕게 되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찾다 보니 정선근 교수를 알게 되었고, 정선근 교수의 <백년 허리>가 허리디스크 예방 및 치료에 관한 바이블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절판 상태! 알라딘 중고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정가 17,500원짜리 책이 무려 45,000원! 책의 가치는 중고 가격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책만 손에 쥐면 허리디스크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거금 45,000원을 주고 중고 서점에서 구입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 <백년 허리>는 업그레이드되어 두 권짜리로 출간됐다. 어쩌겠는가. 새 책을 봐야 더 잘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33,000원을 주고 (울면서 겨자를 먹지는 않았지만) 다시 살 수밖에 없었다.
올해 4월에는 오랫동안 사려고 마음만 먹고 있었던 <행정소송의 이론과 실무>라는 책을 샀다. 서울행정법원 실무연구회에서 펴낸 책으로 행정소송 실무와 관련하여 바이블이라 할 만한 책이다. 이런 좋은 책을 곧바로 안 사고 계속 주저하기만 했던 이유는 이 책이 2014년판이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곧 개정판이 나올 것만 같아서 서점 주인에게 혹시 개정판 소식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개정판 소식이 안 들린다, 개정판은 안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한 달안에 개정판이 나오면 교환해 주겠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래 그렇다면 사자 하는 마음으로 75,000원을 주고 결국 샀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일인가. 이주일 정도 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허리가 아파서 교환하러 가지는 못했다(허리가 안 아팠어도 아마 안 갔을 것이다). 소송을 하면서 이 책 덕을 약간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을유문화사판 <제2의 성> 출간 소식을 듣고, 동서문화사판 <제2의 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아내와 의논했다. 결론은 그냥 가지고 있자는 것. 아무리 잘 된 번역본이라고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그럴 때 다른 번역본과 비교해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동서문화사판은 일본어 중역이라 의미가 보다 명확하게 번역되어 있는 경우도 많아서다. 이런 식의 합리화로 같은 책을 또 사게 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는 했지만, 출판사에서 어느 정도 수요가 예상되는 책에 대해 6개월 내지 1년 전에 출간 예고를 하는 출간예고제 같은 제도가 도입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