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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Sep 23. 2021

명랑한 은둔자

2021. 9. 21. 일기

오일 간의 추석 연휴가 끝나간다.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꾸역꾸역 다 읽은 것과 <오징어 게임>을 본 것 외에는 특별히 한 일이 없다. 머릿속에서는 다가 올 재판을 대비해서 작성해야 할 서면을 썼다 지웠다 나름 분주하기는 했지만, 단지 머릿속에서만 분주했을 뿐이다. 이게 다 추석 즈음에 불어오는 가을바람 때문이다. 스산하고 쌀쌀해서 배가 살살 아프고, 몸에서 힘이 빠진다. 의욕이 사라진다. 여기서 '의욕'은 결국 '생에의 의지'일 터인데, '생에의 의지'를 불사르는 데는 먹는 것만 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리디스크 때문에 체중관리를 해야 해서 양껏 먹을 수가 없으니 그 방법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의욕 없는 상태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휴일을 기억하는 몸의 시계는 비교적 정확하게 작동하니 내일은 의욕이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어떤 에세이는 가볍게 읽히는 반면, 어떤 에세이는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저자의 성격/글의 내용/문체 때문일 것이다. 가볍게 읽히는 에세이는 대체로 지루하다. (저자/독자의) 정신이 긴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는 후자에 속하는 에세이다. 글에 밀도가 있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고, 그 들여다본 내면에서 건져 올린 감정들을 진솔하게 문장에 담았다.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치밀하게 살펴본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었다. 냅이 쓴 글들도 좋았지만, 책 앞에 붙어 있는 옮긴이의 말도 좋았다. 자신이 번역한 책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요즘 김명남이라는 역자의 이름이 자주 눈에 띄는데, 번역을 잘하는 좋은 번역자라는 생각이 든다.


캐럴라인 냅은 거식증과 알코올 중독증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책이 알코올 중독증 탈출기라 할 수 있는 <드링킹>이다. <드링킹>에서 보다 자세히 다뤄지겠지만, 냅이 거식증과 알코올 중독증과 같은 중독증에 시달리게 된 것은 어쩌면 부모-특히 아버지-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부모는 자식의 성격이 형성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고, 결국 자식의 인생을 어느 정도는 (어떤 경우에는 대부분) 결정하게 된다. 부모의 존재/부재는 그 자체로 자식의 성격, 감정, 인생에 영향을 주게 된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 그래서 어떤 독립적인 인격체에 원하건 원하지 않건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처럼 무서운 일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용감한 것일까. 겁이 없는 것일까. 생각이 없는 것일까.


나는 나의 부모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데 두려워서 못 보는 것일까. 아니면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나름대로 적절하게 잘 다루면서 성장을 해 온 것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분명 부모를 넘어서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니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면 부모에게서 받은 영향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의미일 것이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사태에 기원이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원인 없는 결과는 없지 않을까. 기원을 찾는 일이 단지 변명이나 핑곗거리를 찾는 일이 되는 것 같아서 미루고 있을 수도 있겠다. 




좋은 글은, 특히 좋은 에세이는 글을 읽으면서 자꾸 읽는 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글을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명랑한 은둔자>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고독과 고립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허리가 아프면서 뭔가 모르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아마 고립감이었을 것이다. 고독은 즐길 수 있고, 또 때때로 그 자체로 이상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지만, 고립은 즐길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차원에서건 병리적인 현상이다. <명랑한 은둔자>는 내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 그리고 처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한 가지 나쁜 점은, 옮긴이의 말까지 다 읽고 나면 괜히 술이 마시고 싶어 진다는 점이다. 거의 6개월간 술을 한 방울도 입에 안 대고 있는데... 맥주 또는 포도주 한 잔 하고 싶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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