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글 없이 창작할 게 아니라면
좋은 폰트를 찾고 싶다고요? 텍스트를 더 잘 표현하는 방법도요? 이용제 활자 디자이너와 신민주 에디터가 함께 그 방법을 찾아봅니다. 첫째주와 셋째주 금요일마다 연재하는 좋은 폰트 가이드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린 창작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분명 결과물도 좀 더 직관적이고 아름답게 나올 것이다. 그게 우리가 표현방식에 대해 계속해서 촉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래서 다시 도전한다! 글자 인상 읽기 2탄. 글을 배제하고 창작을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게 아니라면 당연히 글자의 표현에도 주목해야지.
단정하고 여유로우면서 어딘가 인자한 사람을 글자로 표현한다면?
무해한 사람. 어딘가 여유롭고 편안해서 조용히 자기 일을 잘하고 있다가, 물어보면 대답을 해 줄 거 같은, 도서관의 사서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 그런 사람을 나는 '아래아'를 보면서 떠올린다.
이들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욕심을 내지 않는다. 글자들이 자기의 공간을 잘 알고 움직이는 듯하다. 빽빽하게 내 자리라고 밀고 들어간 게 아니라, 홀자(모음)는 글자의 공간에서 기준이 될 수 있는 크기로 든든한 기둥이 되고, 닿자(자음)는 그보다는 비교적 작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그래서 잘 그려진 글자들은 공간이 예뻐요.”
차분한 느낌도 든다. 디자이너(김민재)는 폰트 설명에 ‘느린 속도로 그린 듯한 획’을 표현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획에서 강약의 변화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칠거나 날카롭다는 느낌이 없다.
나는 이 글자에서는 ㄷ이나 ㄹ이 모음과 닿는 이음줄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직선적으로 쭉 이어져서 닿는 느낌이. 이 글자의 토대가 된 정주상 선생님의 글씨가 딱 이렇게 생겼다고 한다. 나는 처음 듣는 분인데, ‘교과서’, ‘모범이 되는’ 글씨체의 소유자라고 하셨다.
“글자가 착해요. 힘을 들여서 쓰지도 않고, 멋을 부리려고 하지도 않고. 정갈하고 안정적이고 곱죠.”
듣고 보니 곱다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래아의 둥근 획이 꼭 빤빤한 모 래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린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명랑하고 사랑스럽게 웃는 인상을 글자로 표현한다면?
올록볼록 활기차고 귀엽게 움직이는 글자가 있다. 꽃눈이다. 아르누보의 장식적인 요소와 한글의 흘림체의 영향을 받은 제목용 서체다. 이 글자를 폰트 디자이너(정지혜)는 명랑하다고 했는데, 이건 그 율동감이랄까 리듬감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읽힌다. 글자의 바깥과 글자의 안에서 보이는 움직임이 크니까.
글자 바깥을 보면, 받침이 있는 글자와 없는 글자(민글자) 사이의 높이 차이를 볼 수 있다. 윗선이 정렬되어 아래로 글줄이 오르락내리락하니까 꼭 해맑게 뛰어노는 아이 같다. 다만 이런 표현을 위해 디자이너는 머리를 싸매고 문장부호의 위치를 고민했다고 한다.
받친 글자의 기준에 맞춰서 부호를 넣어줘야 하는가, 민글자의 기준에서 부호를 넣어줘야 하는가. 결국 그는 받침이 없는 글자에 맞춰 넣기로 정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글자들이 ‘다’, ‘요’, ‘까'와 같이 민글자로 끝나는 빈도가 높다는 게 크게 작용한듯하다. 만약 온점이나 느낌표, 물음표가 받친 글자에 맞춰져 있으면, 문장을 끝낼 때마다 온점이 혼자 아래에 똑 떨어져 있어서 어색했을 거다.
“문장부호는 기본적으로 영문 알파벳 기준으로 정해져요. 그걸 그대로 가져오면 한글과 잘 안 어울릴 때가 많아요. 결이 다른 거죠. 그래서 꽃눈을 작업할 땐 이 글자에 맞게 위치를 잡아줄 필요가 있었어요.”
글자 각각을 들여다보면, 곡선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느낌을 받는다. 맺음이나 상투에서도 싹둑 자른 느낌이 아니라 끝에서 살짝 커지면서 도톰해지는 느낌이 들게끔 처리한 게 보인다.
이런 표현들이 우기는 듯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인상을 전달할 수 있던 이유는 뭘까? 디자이너는 원래 장식서체를 만들고 싶어서 지금의 형태보다 훨씬 표현이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걸 다듬고 다듬으면서 많이 걸러졌다고. 특히 처음에 계획한 사용할 글자 크기보다 작게 그리면서 표현을 줄여나갔다고 한다. 역시 그냥 얻어지는 건 없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일상의 순간을 글자의 형태로 표현한다면?
계속 인간에 빗대어 글자의 인상을 풀이하던 가운데, 구보씨만큼은 어쩐지 사람보다는 상황이 떠오른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일상적이고 따듯한 풍경을 설명할 때 쓰기 좋을 거 같다고. 그야말로 사소한 어제와 오늘의 일들을.
“직선으로 그리기보다는 휘어진 선들이 글씨를 손글씨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게 하죠. 예리하지 않고 부드러워요. 그런 면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글씨죠.”
글자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귀여움도 느껴진다. 통통하다고 하기엔 과하고, 적당히 살집이 있는 획들은, 동그랗게 마감된다. 부리와 짧은 기둥은 아담한 발을 위로 든 것처럼 보인다. 획의 대비가 컸다면 이런 부분들이 어린아이보다는 어른의 발에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엔 이런 모습 때문에 ‘따듯 보다는 귀엽다는 말이 더 맞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또 귀여운 구보씨라고 하려니 그렇게 수식할 정도로 귀여움을 타겟한 글자는 아니란 생각도 든다. 따뜻은 또 너무 더운 느낌이고. 포근하다고 하기엔 그렇게 감싸 안을 정도의 너비로 표현된 건 아닌 듯하고. ‘따듯’이 딱이다.
이 글씨에서는 레트로한 감성도 느껴졌다.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일부러 자음과 모음 글자가 분리된 듯 공간을 구성하려고 했다고 한다. 만약에 자음과 모음 글자 사이에 공간이 없이 서로 잘 맞아 떨어졌다면 답답했을 거라고.
차분하게 어디에든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을 글자로 표현한다면
모바일 환경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세리프 폰트가 있다. 아티클이다. 개인적으로는 누벨만큼 좋아한다. 누벨은 강하고 우아해서 좋지만, 아티클은 강단 있게 차분해서 좋다. 직선적이며 상하좌우의 대칭을 맞춘 상태로 균질하게 그렸다. 명조체처럼 획을 예리하게 빼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 않는다. 이 폰트가 그렇게 표현된 건 다 모바일에서 잘 읽히는 글자를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디자이너(임용태)가 원래 UX/UI 디자인을 하다 보니, 여태까지 느낀 불만족을 싹 제거해서 만든 게 아티클이에요. 표현을 많이 줄였죠. 부리도 가늘게 빠지는 게 아니라 싹둑 잘렸어요. 인쇄용이라고 생각하면, 역할을 못 하겠지만, 모바일에서는 약간만 진해도 또렷해지니까요.”
나는 이 글자에서 제거된 표현들 때문에 글자가 여기저기 잘 붙을 수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보다, 담백하게 글자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령 누벨이라면 그만의 목소리나 성격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지만, 아티클은 좀 더 자유로워 보인다고 할까.
만약 이 글자의 부리나 맺음, 귀퉁이들이 직선적으로 끊어진 게 아니라 가늘어진다면 고전적인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고 교수님께 이야기했다. 그건 그거대로 괜찮았겠지만.
“고전적이라는 건 궁서체나 신신명조가 생각날 것 같다는 뜻이겠죠. 붓이라는 도구의 물성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그래요. 마감이 달라서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정돈된 화려함을 글자로 표현한다면?
바람은 전혀 상반된 것 같은 두 가지 특성, 차분함과 화려함을 갖춘 폰트다. 이 폰트는 4개의 웨이트를 가지고 있는데, 가는 글자는 획대비가 많이 생략되어 수수하게 잘 정돈된 글자의 뼈대를 보여준다. 반대로 두꺼워질수록 이 폰트의 화려한 표현이 눈길을 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글자의 맺음 돌기, 꺾임, 부리의 표현, 그리고 획의 선명한 대비가 이 폰트의 인상을 크게 좌우하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과감한데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는 거죠?”
이 글자를 디자인한 교수님의 답은 ‘전체적인 발란스’였다. 수수하게 표현된 글자들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 그렇게까지는 어렵지 않은데, 이런 글자들은 상당히 비대칭적인 표현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려워진다. 그래서 글자의 상하좌우의 무게를 잡을 수 있게 되면, 백의 무게까지 느낄 수 있게 되면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교수님만 해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글자의 좌우만 생각했다고 하니, 분명 개인차는 있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교수님도 2018년에 들어서야 드디어 무엇이든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모종의(?) 자신감을 획득하셨다고 할 정도니…
받침의 미음을 보면 인체 모형에서 골반부분을 보는 것 같다는 인상을 말씀드리니, 교수님은 인체 구조를 생각하면 글자구조를 잡을 때 도움이 된다는 팁을 주기도 했다. 떨어질 곳은 떨어져야 하고 붙어있는 곳은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을 잡을 때 사람의 몸체를 생각하면 좋다고.
예를 들어서 ‘ㄴ', ‘ㄷ’, ‘ㄹ'에서 세로로 내려온 줄기가 이음줄기로 꺾이는 부분들은 팔꿈치를 생각하고 그리면 자연스럽다. ㄴ처럼 팔꿈치를 구부려 보면 팔꿈치 쪽에 뼈가 튀어나오는데, 구부리는 각도에 따라 튀어나오는 위치가 달라진다. 글자가 꺾이는 곳도 그걸 생각해서 그리면 쉽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그리면 인간이 아니라 연체동물 같은 글자가 나오기도 한단다.
“이 글자는 참, 예술적인 재능이 있는 엘리트의 글자 같아요. 글자가 정말 가지런하고 아름다운데, 너무 정돈이 잘 되어 있으니까 약간 천재가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끙… 칭찬으로 들을게요.”
사실 이 글자는 인터뷰를 당하고 있는 이용제 교수님이 만든 글자다. 워낙 잘난 척이나 허풍을 떨지 않는 분이니 옆에서 너스레처럼(너스레가 맞다), 디자이너를 모르는 척 글자에 대한 감상을 말씀드려 보았다. 장난처럼 말하긴 했지만 솔직한 생각이었다. 누벨도 그렇고. 표현의 과감함이 돋보이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모습인 것이 신기했다. 물론 교수님은 글자만 몇십 년을 그린 분이니까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당신이 글자에서 마주친 캐릭터와 상황은?
나는 편집디자인을 할 때 늘 작가나 글의 톤에 맞는 폰트를 찾아본다. 그래서인지 캐릭터나 무드를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는 듯 하다. 아마 이 글을 읽은 구독자들도 폰트를 사용하는 니즈에 맞게 자신만의 해석을 하지 않을까 싶다. 지난 번 폰트 인상해독에서 댓글로 '저는 이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라고 남긴 글을 봤는데, 말했지만 당신의 해석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무척 좋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걸테니까. 이 글에도 댓글로 다양한 해석을 얘기해 주면 기쁠 것이다.
좋은 소식을 하나 말하자면, 9월 중에 <좋은폰트가이드> 글을 기반으로 책이 나올 예정이다. 올린 글과 이미지를 좀 더 친절하게 재편집하고, 기존 좋은폰트가이드 구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글을 추가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글로 매거진 마무리 인사를 건내며 추가적으로 부탁을 남기려고 한다. 이전에 본 글에서 설명이 더 필요하거나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글에 댓글로 알려주길 바란다. 최대한 반영해서 교수님과 함께 작업해 나가겠다. 그럼 그때까지 계속 폰트에 관심을 가지고 디깅하길. 메이 더 폰트 비 윋유.
인터뷰 이용제 활자 디자이너
정리 신민주 에디터
디자인 김민기 그래픽 디자이너
백문이 불여일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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