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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 Aug 04. 2020

기획: 내가 1년간 꾸준히 쓸 수 있는
주제가 있을까?

"멀어서 가까워지는 것들" 독립출판 작업기_3편: 기획의 시작

어떤 주제를 정해야 1년간 꾸준히 쓸 수 있을까?

독립출판 작업기 2편에서 이런 말을 했었죠.

그래서 세 번째 책을 기획했습니다. 기획 전에 세운 철칙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 째는 '1년 동안 좀 더 고민해서 원고를 집필하자'이고 둘 째는 '편집디자인을 공부하자(타이포그래피, 일러스트, 포토샵)'입니다. 

'멀어서 가까워지는 것들'의 주제는 첫번 째 목표 '1년동안 원고를 집필하자'를 달성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나왔습니다. 참고로 그 철칙이 생긴 건 몇몇 분들이 '조금 더 많은 분량의 책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년이라니, 사실 좀 막연했습니다. 쓸 수 있는 건 너무 많았고, 이대로 가다간 두 번째 책처럼 한 권 안 에 주제 세 개가 들어갈 것 같았습니다. 물론 다채롭고 다양한 결이 반짝 반짝 빛나는 그런 책도 좋지만, 같은 걸 또 하긴 싫거든요. 그래서 초점을 옮겨봤습니다.


내가 어떤 상황일 때 글을 많이 쓸까?

어쩌다 보니 오늘 버스에서 찍은 사진이 있네요... 사람들이 유독 없어서 찍고 싶었습니다.

정답! 버스. 저는 버스에서 글을 많이 씁니다. 이유는 집이 경기도 외곽에 있으니까요. 왕복으로 2시간 걸리면 정말 가까운 곳이고, 3시간을 넘기면 보통입니다. 그럴 때 책을 보거나 카카오톡으로 글을 쓰곤 했어요. 간단히 인상 받은 것에 대한 메모, 일할 것 정리, 오늘의 인사이트, 갑자기 떠오르는 글귀 같은 것들을 썼죠. 그래서 1년동안 버스를 타고 쓴 것만 가지고도 충분한 원고를 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나의 생각을 머금은 원고를 엮으면 책이 됩니다. 저는 여태까지 그렇게 책을 만들어왔죠. 그리고 비슷한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너의 이야기라서 좋다' 혹은 '너만의 이야기다'. 너무 특수했던 것 같습니다. 주제도, 서술의 태도도 말이죠. 이번 책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질문을 했어요.


내가 쓸 이야기들을 과연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할까?

1년간 이동중에 글을 쓰겠다는 것은 집필의 상황을 정한 것이지, 결코 그것 자체를 주제로 설정해서는 안될 것 같더군요. 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도보를 걷는 중에 글을 쓰는 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사항은 아니니까요. 만약 상황이 아주 특별하면 가능하겠죠. 우주 여행기라고 생각해 보면, 우주에서 똥싼 걸 써도 될 것이고 비행사들 간의 뒷담화도 좋을 것이고 엄마가 해준 김치가 먹고싶다고도 쓸 수 있고, 아무튼 뭘 써도 사람들은 신기해서 읽어볼 거예요. 다 엄청 일상적인 얘기인데도.


잘 모르겠어서 일단 이동 중에 쓸 수 있는 것들을 다 써봤습니다. 경기도민의 설움을 담은 글(이를 테면 차 하나 놓쳤을 때 벌어지는 일, 10시 이후에도 술을 먹으려고 밤을 샐 각오를 하는 일화, 내 옆자리엔 취객이 있어 한 시간동안 이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했던 순간), 일하고 난 뒤 버스에 타서 아득한 정신을 붙잡고 일의 소회를 쓴 글, 바깥 풍경이 변하는 걸 보면서 계절감을 느끼고 감상에 젖는 글, 콘서트를 보고 와서 음악에 미쳐서 온갖 사랑을 다 표현하는 글, 버스에서 책을 읽다가 느끼는 감상을 쓴 글 등등...


한 3개월 정도 아무생각 없이 쓰고선 4개월째 될 때 다시 읽어봤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공감을 할까?
이 글이 어떤 물음을 남기거나 느낌을 남길 수 있을까? 


반타작...은 무슨 3분의 1만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콘서트 보고와서 쓴 글, 제 고민이 갑자기 버스에서 생각나서 쓴 글, 일의 소회를 쓴 글들은 여지없이 탈락했죠. 제 감정이 부담스럽거나, 갑작스러울 만큼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들이었고, 그도 아니면 내용 자체가 정보 전달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경기도민의 설움을 담은 글만 주구장창 써볼까 싶기도 했어요. 일단 경기도에 사는 많은 분들이 다 공감할 테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나오는 이야기가 좀 뻔하기도 하고 소재도 제한적이라서 좋은 접근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보다는 집이 멀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했으면 했습니다. 

'멀다' 라는 게 굉장히 추상적이잖아요. 어디에 살아도 내가 지친 날에는 집에 가는 길이 너무 길기도 하고. 그래서 패닉의 "달팽이" 첫 소절을 조금 비틀어 [집에 가는 길이 때론 너무 길어]를 책의 제목으로 정했던 때도 있습니다. 결국 제목은 바뀌었지만, 사실 그 가제가 제 원고의 방향을 잡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집에 가는 길이 먼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판형을 그렸고, 그들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내용과 분량을 다루고 싶었어요. 언제 끊어도 다시 읽었을 때 이상하지 않았으면 했고요. 내 바로 옆자리에 앉는 분들이 이 책을 읽는 독자라고 생각했었죠.


바로 내 옆의 당신이 볼 수 있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쓰자.

제 책이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위안을 줄 수 있었으면 했어요. 원고는 그런 내용을 중심으로 꾸렸죠. 바로 당장 내가 지나가거나 머물렀던 곳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었어요. 나의 감성, 나의 고민에서 시작되기보다는 구체적인 것들에서 시작했죠. 


이를테면 옆자리에서 조는 분들도 소재가 되었고, 이어폰이 없이 그냥 유튜브 영상을 크게 키워놓고 보시는 분도 소재가 됐고, 버스의 조명 밝기도 소재가 되었죠. 도로에서 비를 맞는 얘기도 있고, 바쁘게 걸어가다가 보름달을 보면서 쓴 글도 있고, 몰래 지나가는 사람 얘기 듣고 쓴 글도 있는데... 하여튼 결국엔 바로 당장, 책을 읽는 사람 주변에도 있을만한 것들, 그 사람이 지니고 있을만한 감정이나 상태를 중심으로 원고를 썼ㅅ... 원고를 엮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쓸 때는 이게 책에 들어가도 되나 헷갈릴 때도 있거든요. 그럴 땐 그냥 쓰고 나중에 철저히 편집자의 마음으로 뽑습니다. 가끔 이건 좀 특수하지만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 싶은 건 넣기도 해요. 아주 일부지만.


집에 가는 길은 멀지만, 그 길이 그저 지치는 길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실 저는 먼 길 다니는 걸 싫어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아해요. 굳이 돌아서도 가고요. 약간 모험하듯이 즐기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자주 했고, 먼거리의 학교를 다양한 루트로 꽤 오래 걸려서 통학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익숙하고, 그것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이 꽤 많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저한테는 명상의 시간, 휴식의 시간, 그리고 관람의 시간이 거리에서 주어지죠. 


이런 저니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 길에는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저는 이런데, 혹시 지금 어떠세요? 질문을 던져줄 수 있는 에세이를 쓰자고. 그렇게 기획한 책을 엮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예상 독자와 독자의 상황 그리고 주제와 핵심 메세지를 분명히 정해도 독립출판 기획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다음 기획의 단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건 다음 편에 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작업기를 읽는 분들께 드리는 말

독립출판의 형태는 독립출판 제작자가 설정한 목표와 생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제가 고민한 모든 것들, 제가 마주한 문제들을 다른 독립출판 작가들도 똑같이 고민할 것이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완전히 다르지도 않겠지만, 저마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독립출판을 할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 작업기를 자신의 독립출판에 그대로 대입해보기보다는, 그저 익민주라는 한 인간의 독립출판 케이스라는 점을 생각해주시고, 저와 같은 질문을 했던 분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혹은 도움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기록한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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