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서 가까워지는 것들" 독립출판 작업기_5편: 집필
'일기장을 책으로 엮으려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보세요.' 출판에 대해서 배울 때 그 얘기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어느 작가님의 북토크 때도 들었고, 어느 출판사 편집장님의 출판 수업에서도 그 얘기를 들었죠.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이사 일기장을 책으로 낸들 알게 뭔가요. 내가 아는 사람의 일기장을 들춰보는 것보다도 재미가 없지 않을까 싶었죠.
독립출판물 중 '타인이라도 관심을 가질만한' 어떤 기록이 엮인 일기장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 나갑니다. 일기장이라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아닙니다. 심지어 기성출판물 중에도 일기장이 책이 된 케이스가 있고요. 민음사에서 나온 [베를린 일기]가 그 예입니다. 최민석 작가님이 맛깔나게 쓴 베를린에서의 하루하루를 읽다보면 '웃픔'이라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느낄 수 있죠.
그렇다면 일기장을 책으로 엮지 말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말하자면 독자를 고려한 원고를 쓰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완전히 자기 안의 특수한 이야기를 쓰지 말라는 게 아니고 특수한 이야기라도, 알아듣게 쓰라는 거죠.
우리는 보통 일기를 쓸 때 자기 자신을 위한 기록을 합니다. 많은 정보를 생략하죠. 그래서 타인의 일기를 읽을 때나, 먼 옛날 자신 쓴 일기를 읽을 때도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도대체 어떤 사건을 말하는 거지?'하고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가령 굉장히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한 달 동안은 아무런 글도 없다가 갑작스레 영문 모를 우울한 글을 쓴 게 책으로 출판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가운데의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에 답답해지겠죠.
그럼 읽는 사람은 일기장 속 인물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추측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기장이면 '에이, 좀 자세하게 쓸 걸'하고 스스로 아쉬워 하면서 넘기면 되지만, 그게 책이라서 나 아닌 누군가가 본다면 작가가 불친절하다거나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느낄 겁니다.
그래서 집필을 할 때부터 독자를 고려한 친.절.한. 글쓰기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독자를 고려해서 글을 거르는 일이나 수정하는 일은 편집 때도 하겠지만, 그건 글을 다 쓴 이후의 일이고요. 각각의 원고를 집필 할 때 기본적으로 독자를 고려해서 글을 쓸 필요가 있습니다. 육하원칙을 지켜서 기사 처럼 역 삼각형으로 쓸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적어도 이 한 꼭지의 글을 이해할 때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거죠.
제가 삭제한 '프리랜서가 버스에서 하는 일' 이라는 원고가 하나 있는데, 그걸로 설명을 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저녁 5시 52분. 종로로 향하는 광역버스 안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앞에서 부터 네번째 자리 맨 왼쪽에 앉아있다. 창가 옆으로는 반대차선으로 느릿느릿 달리는 차들이 보인다.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집으로 달려가는 저 길은 곧 더 막히겠지.
프리랜서인 나는 그들과 다른 시간을 산다. 일을 하기 위해 저녁에 서울로 향하는 이유다. 오늘은 폴인 푸드테크 스터디 3기가 시작되는 날. 스터디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이 내 일이다. 기록한 글은 이후 폴인 웹사이트에 디지털 리포트로 재가공 된다. 원래는 돈을 내고 봐야 하지만 스터디를 듣는 사람들에겐 그 디지털 리포트도 제공된다. 그래서 이 스터디에 가면 나는 기록할 정보들과 내 글의 독자가 되는 사람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참 반가운 곳이다. ...(생략)
그 뒤는 '이렇게 행사에 참여한 건 다 페이스북에 기록한다. 어디에서? 버스에서. 왜? 그게 내 브랜딩 방법이니까.'라는 내용이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아서 생략했습니다. 그냥 자기 기록용이라면, '폴인 푸드테크 스터디가 시작됐고, 나는 디지털 리포트 제작을 맡아서 그 소감을 페이스북에 기록했다.'만 남겨도 됩니다. 하지만 독자가 볼 거니까 조금 더 상세하게 내용을 풀어 준 거죠. 무슨 행사고, 어떤 리포트고, 이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고, 그걸 하는 이 공간은 어디고, 지금 어떤 상황이고, 그런 것들을.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쓴 건 아니고요. 초반에 정말 일기같이 써서 삭제한 '()'라는 원고가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세상은 이미 은유로 가득 차 있는데, 직설적이면 어떻고 은유적으로 말하면 어때. 난 차이가 지겹고, 구분해 내는 것보다 느끼는 것에 집중하고 싶어.
2019년 10월 14일 월요일 오후 7시 버스 안에서
이건 어쩌라는 건지. 나중에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에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라는 단편소설집을 봤거든요. 분명 그걸 읽으면서 한 생각인데, 당최 제 감정도 이해가 안되고. 정확히 어떤 내용을 보고 쓴 건지도 모르겠는 거예요. 짧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이 한 꼭지가 어떤 상황인지 분명히 그려지지 않잖아요. 글 자체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컨셉에서 벗어난 이 글은 과감하게 삭제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보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출판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일기장을 내려는 건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기보다 '독자에게 내 마음 속 비밀번호를 맞춰보라고 강요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라고 하면 어떨까. 대부분의 독자는 작가의 마음을 맞추려고 책을 보는 게 아닌 거 같거든요. 특히 에세이는, 내 마음을 뉘이려고 보는 경우가 저는 더 많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읽기 쉽게 써야 하는 거죠. 제가 지난 두 차례의 책을 내면서 했던 생각이기도 하고요. 때로 저한테 그런 말을 해주시는 책방 사장님도 있었답니다. 다음 책은 부디 암호를 거둬 달라고.
물론 그 책들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닿길 바라지도 않았고, 어쩌면 "내 마음은 당나귀 귀!"라고 말하기엔 좀 부끄러워서 이해하기 어렵게 서술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일 때는 그렇게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번 책을 쓰는 저는 또 다른 사람이니까, 암호를 최대한 걸렀습니다. 혹시나 좀 남은 게 있을 수도 있는데요. 말장난이나, 해석을 곁들인 상징 같은 것들은 감추지 않았죠. 그 외에도 발견할 때마다 조금씩 고치고 있습니다. 집필 때부터 이런 것들을 좀 염두에 둔 덕에 예전보다는 확실히 암호장이 아닌 책을 내지 않을까, 일상의 기록을 좀 더 쉽게 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에도 집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집필할 때 고민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는 게 쓰다보니 은근히 양이 꽤 되네요. 다음엔 그 중에서도 분량과 톤에 대해 고민했던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작업기를 읽는 분들께 드리는 말
독립출판의 형태는 독립출판 제작자가 설정한 목표와 생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제가 고민한 모든 것들, 제가 마주한 문제들을 다른 독립출판 작가들도 똑같이 고민할 것이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완전히 다르지도 않겠지만, 저마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독립출판을 할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 작업기를 자신의 독립출판에 그대로 대입해보기보다는, 그저 익민주라는 한 인간의 독립출판 케이스라는 점을 생각해주시고, 저와 같은 질문을 했던 분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혹은 도움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기록한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