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주 Aug 25. 2020

내 안의 작가와 편집자가 싸울 때

"멀어서 가까워지는 것들" 독립출판 작업기_12편: 원고의 수정과 삭제

편집자 민주 : 작가님, 이 원고는 저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독립출판 작가는 작가의 인격과 편집자의 인격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해서 둘 간의 조율이 매우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죠. 한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보통 원고를 쓰고나서 편집에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이미 나는 에세이를 썼을 때의 고민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시점입니다. 이미 나의 삶은 다른 국면에 들어섰고, 그때의 시간들이 왜 그렇게 치열했는지 때로는 이해를 못하죠. 옛날이야기. 벌써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즉, 편집자 민주는 작가 민주 였던 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94년산 박민주를 만들 때 가장 신기했던 건, 작가로서의 저는 "25살까지 정말 잘 살았어. 지금까지 잘 버텨온 나를 위해 취얼스! 하는 의미로 책을 만들어주고 싶어."의 입장이었지만, 편집자로서의 저는 이미 그 '멋지다 25살! 아름답다 반오십!'이라는 뽕을 글쓰기로 소진 한 이후라... "뭐가 그렇게 좋다는 겨... 아휴, 고되다 고되. 할일이 넘쳐나는 구먼... 뭐 이리 쓴 게 많댜. 뭔 잡동사니를 이렇게 많이 쌓아놨댜?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냥...?" 이러면서 아주 지겨워 했었죠. 저는 그때 내가 이래도 되나 싶었어요. 그때 몇 교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원고가 닳을 만큼 봤거든요. 


내가 편집한다고 작가로서 여기저기에 심어둔 의도를 다 챙겨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기억하고 아쉬워 하기는 했죠. 하지만 '에이, 그래도 이건 너무 특수한 이야기다. 지한테만 중요한 이야긴데?'라면서 남처럼 다 삭제 삭제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굉장히 서글펐죠. 과거의 내 기록을 내가 잘 몰라주는 것 같기도 하고. 해치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때의 진심을 지금의 내가 수정하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자주 했습니다. 그땐 분명 모든 것에 의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나고보니 다 그냥 지나가도 됐을 일이 아녔을까 싶기도 했고요. 94년산 박민주를 만들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난민주일기를 떠올린 것 같기도 해요. 미래의 나와 과거의 내가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좀 더 그 갭을 줄여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작가로서 지난민주일기 쓸 때는 미래의 편집자의 눈치를 보면서 글을 썼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편집자 놈팡이가 지금 이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있게 내가 쓸 수 있을까? 으으으.. 안 될 것 같아. 일단 기록은 하되 별 기대는 하지 말아야 겠다.' 이렇게 써서 결국엔 삭제된 것도 있고, 페이지가 비어서 라든가, 다른 중요한 이야기의 밑그림이 되는 기록이라서 그 자체로는 딱히 임팩트가 없어도 실은 것도 있었죠.


<멀어서 가까워지는 것들>은 편집과 집필을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만드는 책은 편집 기간이 타이트해서 편집과 집필을 동시에 합니다. 바쁠 것 같기도 한데 제작 방법이 꽤 만족스럽습니다. 기간이 겹치니까 작가로서의 저와 편집자로서의 제가 비로소 공존하는 기분이랄까요. 쓰면서 부터 알 때가 있어요. 이거는 넣겠다. 이건 못 넣겠다. 그래도 사실 집필의 시간이 끝나면 비로소 칼을 든 편집자가 "진정한 원교, 투교, 쓰리교, 교교교! 내 칼을 받아라!"를 외치면서 모든 걸 가차없이 쳐 내겠죠.


예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편집자는 자기가 작업한 책을 안 산다고. 보다보다 질려서. 어떤 출판사 대표님이 해주신 얘기였는데, 저는 그 말이 은근히 위안이 되었습니다. 한 때는 약간 죄책감까지 들었던 적이 있거든요. 내 책인데, 내가 이렇게 애정이 없다니! 하고. 근데 그건 애정이 없는 게 아니였어요. 애정이 있다못해 애증이 된 것이지. 결국엔 다시 또 보긴 하거든요(약간 후회하면서). 그러니 내 안의 편집자를 너무 미워하지 말고 잘 이용하는 게 독립출판 작가로서 현명한 일이겠죠.


다른 분들의 출판 방식은 또 저와 다를 겁니다. 뭔가 인터뷰의 꼭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네요. 편집자로서의 나와 작가로서의 내가 다른 것 같은지. 편집을 할 때 예전의 글을 보면 그냥 바로 그때가 다 생각이 나는지. 편집기간이 짧은 게 좋은지 긴 게 좋은지. 작가로서의 내가 이해가 안되었던 적은 없는지. 몇 교까지 해봤는지. 뭐 이런 것들. 누가 안하면 독립출판물로 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은 책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특히 제가 어떤 레퍼런스들을 참고했는지, 많은 사진과 함께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 작업기를 읽는 분들께 드리는 말
독립출판의 형태는 독립출판 제작자가 설정한 목표와 생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제가 고민한 모든 것들, 제가 마주한 문제들을 다른 독립출판 작가들도 똑같이 고민할 것이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완전히 다르지도 않겠지만, 저마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독립출판을 할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 작업기를 모든 독립출판에 그대로 대입해보기보다는 그저 익민주라는 한 인간의 독립출판 케이스라는 점을 생각해주시고, 저와 같은 질문을 했던 분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혹은 도움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기록한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