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서 가까워지는 것들" 독립출판 작업기 23편: 종이
천에다가 글자를 인쇄하려 했던 분의 이야기도 얼핏 들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종이에 인쇄를 합니다. 모였을 때는 책의 형태를 이루고, 낱낱이 들여다 보면 질감을 주는 종이.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독립출판에서는 원한다면(+ 돈이 많다면X100) 얼마든지 정말 비싸고 유니크한 종이를 사용해서 책을 만들 수 있죠.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종이를 많이 알아봤죠. 저는 제작자이기도 하지만 회사에서 외주 받아 기획 및 제작을 담당하기도 해서 종이 샘플을 많이 받았고 사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주변에서 종이를 고르고 쓰고 주문해서 발주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듯 알게 된 게 참 많았죠. 그것들 중에 3가지를 오늘은 풀어보려고 해요.
종이의 종류는 크게 국전지와 4*6전지가 있습니다. 국전지는 A3, A4, A5같이 A로 시작하는 판형의 책을 뽑았을 때 효율이 좋고, 4*6 전지는 B3, B4, B5 같이 B로 시작하는 판형의 책을 뽑았을 때 좋습니다. 문제는 내가 쓰고 싶은 예쁜 종이들은 다 4*6전지로만 들어오는데, 나는 A5와 비슷한 판형의 책을 만들 때 일어나죠. 할 수는 있는데,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게 됩니다. 버리는 종이가 많아지니까요.
이해하기 좋게 예를 들자면
10cm*10cm(총 면적 100)의 전지만 이 세상에 있다고 쳐볼게요. 5*5 사이즈(총면적 25) 종이는 4장 찍을 수 있어요. 6*4사이즈(총면적 24)도 종이도 4장 찍을 수 있고요. 그런데 면적만으로 놓고 보면 같은 8*3사이즈(총 면적 24)는 3장 밖에 못 찍어요. 그러고도 28cm²이 남죠. 그럼 그만큼 종이를 버려야 하는 겁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8*3사이즈로 잡고 다 만들어놨는데, 그 세상의 전지는 10*10짜리 밖에 없다면? 그 사람은 같은 부수를 찍어도 5*5나 6*4를 찍는 사람보다 돈이 더 들 거예요.
어떤 인쇄소는 적당히 주름진 종이까지 인쇄 가능합니다. 어떤 인쇄소는 주름진 건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바깥에서 사온 종이로 뽑는 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또 어떤 인쇄소는 절대로!!! 절대로!! 그 인쇄소에서 취급하는 종이만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종이가 있는데, 그걸 내치는 인쇄소도 있다는 점. 그럴 때는 발품을 파시거나 그냥 순응 하십시오... 거기까지 안 게 어딘가요.
삼화, 한솔 뭐 이런 제지사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런 종이 회사들은 보통 종이를 연단위(그냥 엄청 길다!! 아주 길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편합니다)로 팔아요. 조금 더 싸게 살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뭐 두성이나 삼원 같은 경우에는 을지로에 가면 재단 된 걸 살 수도 있고요. 아니면 조금 더 발품을 팔아서 '지업사'를 찾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종이를 공수하기 전에 내가 원하는 그 종이를 인쇄소에서 받아줄지 확인하는 게 좋겠죠.
덧붙여 말하자면,
인쇄소라고 다 같은 인쇄소가 아닙니다. 규모가 크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요. 작아도 내가 원하는 종이로 조금 더 합리적인 가격에 뽑을 수 있는 곳이 있고. 커도 퀄리티 안 좋게 뽑는 인쇄소가 있어요. 그걸 다 내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답니다.
어떤 곳은 인쇄소처럼 생각했지만, 알고보면 인쇄소가 아니라... 어... 플랫폼? 플랫폼 같은 곳도 있어요. 종이도 책이 되기 전까지 거쳐야 할 과정이 많거든요. 본인들이 사용할 종이만 딱 정해놓고 재단, 인쇄, 제본, 후가공을 다 다른 곳에 맡기는 거예요. 그 중간에서 이제 디렉팅을 해주고 책을 뽑아내는. 그런 곳이 있어요. 그런 곳에서는 종이를 지업사나 종이 회사에서 사오겠다고 하면, "그런 거라면 그냥 아는 인쇄소에 가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가서 상담하기 전까지는 알기 힘들다는 것. 덧붙이자면 제가 상담받았던 곳은 굉장히 책을 잘 뽑는다고 유명한 곳이었어요. 저도 추천 받아서 간 거고요.그러니까 퀄리티와는 상관없이 그냥 과정에 있어서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 없는 곳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지난민주일기를 만들때의 일이었는데요. 저는 콩코르 레이드 텍스쳐(와 어떻게 이걸 기억하는지 제가 더 신기하네요. 진짜 그걸 표지에 넣고 싶었는데 흑흑) 종이를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당시에 알고 있던 인쇄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죠. 주름이 있는 종이였거든요. 그 종이는 결국 포기했고. 저는 내지라도 네오스타 미색지로 하겠다며 부득부득 다른 인디고집에 연락을 넣었던 것이 기억 납니다. 그렇게해서 만들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어차피 콩코르 레이드는 얇아서 표지에 쓸 종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인쇄는 다른 종이에 하고 차라리 북커버 처럼 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지는 그냥 미색모조지로 하고요.
저는 이제 종이 욕심이 많이 줄었어요.
질감까지 욕심을 부릴만큼 디자인을 딱 떨어지게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애초에 이번 책은 매끈하게 잘 뽑는 게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요. 워낙 돌아다니면서 느낀게 많기도 했고. 꼭 종이에 힘을 안 줘도 다른 요소로 어필 할 수 있더라고요. 인쇄소 아저씨들한테 부탁드리는 것도 죄송하고. '그건 안돼. 이 아가씨가 뭘 모르네-'라는 듯한 느낌의 대화를 하는 것도 지겹고. 무엇보다, 제 책의 디자인을 고려해서 부렸던 종이 욕심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독립출판 작가니까! 내가 쓰는 종이도 아주 유니크 해야해!!'라는 병
...같은 것에 걸려있지 않았을까요. 유니크한 종이를 쓰고 싶은 독립출판 작가가 있을 순 있지만. 독립출판 작가라고 해서 꼭 남들 안쓰는 방법을 택해야 할 필요는 없는데. 음음. 본인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책을 내고 행복해 하면 그뿐인 것을. 그때는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정했던 종이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제가 그렇게 나약해 보였답니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이미 세상에서 나 밖에 못 쓰는 책인데.
-라고 말했지만 저는 지금 후가공병에 걸려있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반복하죠. 히히히. 물론 이건 다음달에나 쓸 수 있는 주제지만요(샘플 뽑고 감리 보면서 쓰게 되겠지요). 에폭시와 형압과 박의 세계가 참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책에는 형압이 들어갑니다. 앗 이건 비밀이에요.
오늘 이렇게 종이 개론(?)을 펼쳤으니 다음편에는 “멀어서 가까워지는 것들”을 어떤 종이로 제작할 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작업기를 읽는 분들께 드리는 말씀
독립출판의 형태는 독립출판 제작자가 설정한 목표와 생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제가 고민한 모든 것들, 제가 마주한 문제들을 다른 독립출판 작가들도 똑같이 고민할 것이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완전히 다르지도 않겠지만, 저마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독립출판을 할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 작업기를 모든 독립출판에 그대로 대입해보기보다는 그저 익민주라는 한 인간의 독립출판 케이스라는 점을 생각해주시고, 저와 같은 질문을 했던 분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혹은 도움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기록한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