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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주 Sep 17. 2020

‘독립출판물이라면 종이는 내 맘대로!’ 라는 착각

"멀어서 가까워지는 것들" 독립출판 작업기 23편: 종이

물성의 책은 활자와 종이가 있어야 만들어집니다.

천에다가 글자를 인쇄하려 했던 분의 이야기도 얼핏 들은 기억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종이에 인쇄를 합니다. 모였을 때는 책의 형태를 이루고, 낱낱이 들여다 보면 질감을 주는 종이.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독립출판에서는 원한다면(+ 돈이 많다면X100)  얼마든지 정말 비싸고 유니크한 종이를 사용해서 책을 만들 수 있죠.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종이를 많이 알아봤죠. 저는 제작자이기도 하지만 회사에서 외주 받아 기획 및 제작을 담당하기도 해서 종이 샘플을 많이 받았고 사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주변에서 종이를 고르고 쓰고 주문해서 발주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듯 알게 된 게 참 많았죠. 그것들 중에 3가지를 오늘은 풀어보려고 해요.



첫째. 판형에 따라서 고를 수 있는 종이가 (거의) 정해져 있다

종이의 종류는 크게 국전지와 4*6전지가 있습니다. 국전지는 A3, A4, A5같이 A로 시작하는 판형의 책을 뽑았을 때 효율이 좋고, 4*6 전지는 B3, B4, B5 같이 B로 시작하는 판형의 책을 뽑았을 때 좋습니다. 문제는 내가 쓰고 싶은 예쁜 종이들은 다 4*6전지로만 들어오는데, 나는 A5와 비슷한 판형의 책을 만들 때 일어나죠. 할 수는 있는데,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게 됩니다. 버리는 종이가 많아지니까요.


이해하기 좋게 예를 들자면

10cm*10cm(총 면적 100)의 전지만 이 세상에 있다고 쳐볼게요. 5*5 사이즈(총면적 25) 종이는 4장 찍을 수 있어요. 6*4사이즈(총면적 24)도 종이도 4장 찍을 수 있고요. 그런데 면적만으로 놓고 보면 같은 8*3사이즈(총 면적 24)는 3장 밖에 못 찍어요. 그러고도 28cm²이 남죠. 그럼 그만큼 종이를 버려야 하는 겁니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8*3사이즈로 잡고 다 만들어놨는데, 그 세상의 전지는 10*10짜리 밖에 없다면? 그 사람은 같은 부수를 찍어도 5*5나 6*4를 찍는 사람보다 돈이 더 들 거예요.



둘째. 인쇄소마다 취급하는 종이가 다르다

어떤 인쇄소는 적당히 주름진 종이까지 인쇄 가능합니다. 어떤 인쇄소는 주름진 건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바깥에서 사온 종이로 뽑는 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또 어떤 인쇄소는 절대로!!! 절대로!! 그 인쇄소에서 취급하는 종이만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종이가 있는데, 그걸 내치는 인쇄소도 있다는 점. 그럴 때는 발품을 파시거나 그냥 순응 하십시오... 거기까지 안 게 어딘가요.



셋째. 인쇄소 밖에서 종이를 떼어 오는 방법도 있다.

삼화, 한솔 뭐 이런 제지사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런 종이 회사들은 보통 종이를 연단위(그냥 엄청 길다!! 아주 길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편합니다)로 팔아요. 조금 더 싸게 살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뭐 두성이나 삼원 같은 경우에는 을지로에 가면 재단 된 걸 살 수도 있고요. 아니면 조금 더 발품을 팔아서 '지업사'를 찾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종이를 공수하기 전에 내가 원하는 그 종이를 인쇄소에서 받아줄지 확인하는 게 좋겠죠.


덧붙여 말하자면,

인쇄소라고 다 같은 인쇄소가 아닙니다. 규모가 크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요. 작아도 내가 원하는 종이로 조금 더 합리적인 가격에 뽑을 수 있는 곳이 있고. 커도 퀄리티 안 좋게 뽑는 인쇄소가 있어요. 그걸 다 내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답니다.


어떤 곳은 인쇄소처럼 생각했지만, 알고보면 인쇄소가 아니라... 어... 플랫폼? 플랫폼 같은 곳도 있어요. 종이도 책이 되기 전까지 거쳐야 할 과정이 많거든요. 본인들이 사용할 종이만 딱 정해놓고 재단, 인쇄, 제본, 후가공을 다 다른 곳에 맡기는 거예요. 그 중간에서 이제 디렉팅을 해주고 책을 뽑아내는. 그런 곳이 있어요. 그런 곳에서는 종이를 지업사나 종이 회사에서 사오겠다고 하면, "그런 거라면 그냥 아는 인쇄소에 가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하지만 가서 상담하기 전까지는 알기 힘들다는 것. 덧붙이자면 제가 상담받았던 곳은 굉장히 책을 잘 뽑는다고 유명한 곳이었어요. 저도 추천 받아서 간 거고요.그러니까 퀄리티와는 상관없이 그냥 과정에 있어서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 없는 곳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고집있게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지난민주일기를 만들때의 일이었는데요. 저는 콩코르 레이드 텍스쳐(와 어떻게 이걸 기억하는지 제가 더 신기하네요. 진짜 그걸 표지에 넣고 싶었는데 흑흑) 종이를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당시에 알고 있던 인쇄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죠. 주름이 있는 종이였거든요. 그 종이는 결국 포기했고. 저는 내지라도 네오스타 미색지로 하겠다며 부득부득 다른 인디고집에 연락을 넣었던 것이 기억 납니다. 그렇게해서 만들었습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어차피 콩코르 레이드는 얇아서 표지에 쓸 종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인쇄는 다른 종이에 하고 차라리 북커버 처럼 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지는 그냥 미색모조지로 하고요.



저는 이제 종이 욕심이 많이 줄었어요.

질감까지 욕심을 부릴만큼 디자인을 딱 떨어지게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애초에 이번 책은 매끈하게 잘 뽑는 게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요. 워낙 돌아다니면서 느낀게 많기도 했고. 꼭 종이에 힘을 안 줘도 다른 요소로 어필 할 수 있더라고요. 인쇄소 아저씨들한테 부탁드리는 것도 죄송하고. '그건 안돼. 이 아가씨가 뭘 모르네-'라는 듯한 느낌의 대화를 하는 것도 지겹고. 무엇보다, 제 책의 디자인을 고려해서 부렸던 종이 욕심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독립출판 작가니까! 내가 쓰는 종이도 아주 유니크 해야해!!'라는 병

...같은 것에 걸려있지 않았을까요. 유니크한 종이를 쓰고 싶은 독립출판 작가가 있을 순 있지만. 독립출판 작가라고 해서 꼭 남들 안쓰는 방법을 택해야 할 필요는 없는데. 음음. 본인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책을 내고 행복해 하면 그뿐인 것을. 그때는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정했던 종이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제가 그렇게 나약해 보였답니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이미 세상에서 나 밖에 못 쓰는 책인데.


-라고 말했지만 저는 지금 후가공병에 걸려있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반복하죠. 히히히. 물론 이건 다음달에나 쓸 수 있는 주제지만요(샘플 뽑고 감리 보면서 쓰게 되겠지요). 에폭시와 형압과 박의 세계가 참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책에는 형압이 들어갑니다. 앗 이건 비밀이에요.


오늘 이렇게 종이 개론(?)을 펼쳤으니 다음편에는 “멀어서 가까워지는 것들”을 어떤 종이로 제작할 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작업기를 읽는 분들께 드리는 말씀

독립출판의 형태는 독립출판 제작자가 설정한 목표와 생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제가 고민한 모든 것들, 제가 마주한 문제들을 다른 독립출판 작가들도 똑같이 고민할 것이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 완전히 다르지도 않겠지만, 저마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독립출판을 할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 작업기를 모든 독립출판에 그대로 대입해보기보다는 그저 익민주라는 한 인간의 독립출판 케이스라는 점을 생각해주시고, 저와 같은 질문을 했던 분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혹은 도움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기록한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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