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란 게 다 그런건데 난 뭘 기대했나
인생 공짜 없다. 그 말 진짜 요즘 미친듯이 느낀다.
전화기 너머로 친구는 친구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의 괴로움을 호소하며 동지애를 쌓아간다. ‘우리청춘 파이팅’이라는 말을 언제였지, 한 25살 때부터 듣고 썼던 것 같은데… 이젠 그 말이 목구멍에 붙어서 나오지도 않는다. 힘을 그만내고 싶어. 적당히 그냥 알아서 척척 최고의 선택을 하는 인생 N회차 인간이고 싶어.
내가 뭘 너무 많이 만드는 중이라 그럴 수도 있다. 음악도 만들고, 내 책도 만들고, 남의 책도 만들고, 뉴스레터도 만들고, 다른 곳에서 뉴스레터를 또 만들고, 배너 디자인도 하고, 인스타그램 썸네일도 만들고, 인터뷰도 하고 헉헉…
그럼 딱 저 일만 할 거 같겠지만. 그에 따라 미팅도 해야 하고, 가격도 산정해서 어떻게 얼마나 일할지 조율도 해야 하고, 목적이 뭔지, 어떤 결과를 낼지 기획도 해야 하고. 뭐 하나 그냥 간판에 내건 일만 ‘띡-‘ 하고 되지 않는다.
문득 활자공간에 갔다가 들었던 이 말이 떠오른다.
활자를 만들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되게 괴로워 할 때가 있어요. 글자를 그릴 줄 알았는데, 1년이 지나도 못 그리는 경우도 많고. 문장부호를 그리거나 한 번 써 본 적도 없고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약물기호 그리거나 뭐 그런 일도 있죠. 그것 때문에 실망하고 중도에 포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수업을 들었다고 해도 끝까지 자기 글자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소수예요.
_이용제 교수님
그냥 지나가듯 들었던 말이었는데, 모든 일이 다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A를 한다고 A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것. 디자인 한다고 일러스트 켜서 뚝딱 뭔가를 만드는 일만 하는 게 아니고. 글도 그냥 키보드 누르면 슉슉 써지니까 대단하지 않은 것 처럼 보이지만, 무엇을 말할 건지 생각하지 않고, 단락과 단락, 줄과 줄의 의미를 아무 생각도 없이 늘어 놓으면 그냥 글자 덩어리가 될 뿐 마음에 닿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 글을 쓸 때는 뭘 쓸 건지 어떻게 쓸 건지 헤매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고, 그 짓을 하는 동안엔 결과물 그 자체의 분량은 전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면 조바심이 나지만(안 그래도 할 일이 드럽게 많은데 당장 써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그래도 잘 헤매서 뭘 어떻게 할 건지 정리할 시간은 필요하다. 글을 써 본 경험이 없으면 없을 수록 더 길게.
내 이름달고 내 것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오리지널리티도 신경을 써야 한다.
공짜가 공짜인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무료폰트를 너무 많이 써요.
_이용제 교수님
이건 음악도 똑같다. 요즘엔 샘플만으로도 정말 쉽게 음악을 만들 수 있는데, 공짜고 대충 마음에 든다고 덮어놓고 쓰면 안 된다. 퀄리티가 떨어질 가능성도 높고, 누구나 쉽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하고 똑같은 거 만들어도 괜찮다면 뭐… 상관없겠지만. 고집을 부리고 싶다면, 내가 소리를 만들든가, 아니면 샘플을 샘플티가 안나게 쓰든가, 기존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인데 의도에 맞는)으로 쓰든가 품을 들여야 하는 거지. 근데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모든 게 다 그렇다. 으흑흑. 그 공부에도 돈이 든다! 결국 다 돈이 든다! 시간이 든다! 인생, 공짜 없다!
…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돌이켜 보자면 최근 두달간 제일 빡셌던 건 작곡과 뉴스레터 채널 제작이었다.
사람들은 그래. 다들 무슨 엄청난 비결이 있는 줄 아는데, 사실은 다 하나하나 세팅하는 거야. 다 알고, 이제 손에 익으면 그게 사람들한테는 쉬워 보이는 거야.
_미디쌤
미디 작곡을 알려주는 선생님은 그런 말을 했는데….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지만, 뉴스레터 제작도 딱 그런 느낌이었다. 하나하나 세팅. 하.나.하.나.세.팅. 이름은 당연하고, 컨셉, 톤앤매너, 배너, 로고 디자인, BI, 썸넬 같은 기초 공사를 지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편집하고, 글로 쓰고 발행하고, 웰컴메일 만들고, 구독 페이지 만들고, 아카이빙페이지 만들고….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내가 그랬듯이). ‘음, 인터뷰 해서 글로 써서 보낸 거구나?’라고. 나는 이번 작업을 계기로 뉴스레터를 제작하는 분들에 대한 어떤 존경심이 생겼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과는 매우 다른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인건 글은 내가 손에 좀 익은 분야라는 것이고(디자인은 차마 그렇다고 말 못하겠다).
그래서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언젠가 과거를 돌아보면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인생을 너무 날로 먹었던 게 아닐까?’라는. 남들이 쉽게 한 것처럼 보여서 나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쉽게 했는데, 마음처럼 안 나와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나날이었구나. 애도 안 쓰고 잘 익은 감을 먹기를 바랬던 나날이었구나. 현타가 왔었고. 속이 쓰렸다. 날로 먹은게 뒤늦게 체한 건지.
잘하고 싶다면 반드시 헤매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진득하게 수비드 해서 익혀먹고 찜쩌먹고 구워먹고 해볼라니까, 기다려 봐라. 나도 언젠가 인생 N회차 같이 요령있게, 스무스하게, 멋지게 하고 말 거야. 일단은… 갈 길이 멀지만, 멀 수록 돌아가라고… 헤매자.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