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과 가치, 그 둘을 만족시키는 폰트페어링
좋은 폰트를 찾고 싶다고요? 텍스트를 더 잘 표현하는 방법도요? 이용제 활자 디자이너와 신민주 에디터가 함께 그 방법을 찾아봅니다. 첫째주와 셋째주 금요일마다 연재하는 좋은 폰트 가이드입니다.
글도 쓰고 디자인도 하고 음악도 만드는 내 입장에서 요즘 드는 생각은 이거다. ‘역시 좋은 게 좋아 보이는 이유는 좋을 때까지 했기 때문이다.’ 딱 떨어지는 무언가를 만드는 데 절대적인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크리에이터 자신이 자기의 느낌을 믿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게 된다. “어떻게 하면 예쁜 결과물을 낼 수 있나요?”라고. 정답을 알 수는 없어도 ‘좋음의 방향엔 이런 게 있구나’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고심 끝에 얻은 것 역시 어려움 끝에 나왔다는 걸 알 수 있기도 하고.
그래서 오늘도 직접 해보는 것 만큼의 소득은 없을 것이나 몇가지 힌트를 얻어 마음속 초조함을 달래 보고자, 질문을 한다. 교수님은 폰트 디자이너고, 편집디자인도 하시고, 그러니까…
교수님은 어떤 폰트를 책에 넣고 계신가요?
사실 나는 관념적으로 그냥 ‘어떤 모양을, 어떤 판형에 넣고 싶다’ 정도는 생각하지만 교수님은 막 인디자인을 켜고, 마치 기계처럼 합성 글꼴을 짜고 있을 거란 기대를 했다. 인공지능처럼, ‘음, 사전을 만들 땐 어쩔체와 저쩔체를 넣어서 완성하면 된다네. 엣헴.’ 이럴 거 같다는 생각?
“아, 아직 정리가 안 됐는데 한 번 보시겠어요?”
하지만 마법은 없었다. 교수님은 언제고 책에 쓸 글자체는 바뀔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디자인에 레이아웃을 얹어둔 것들을 보여주셨다. 어디에 무엇을 넣을지 대략적으로 밑그림을 그려놓고 있는 상태였다. 일단 덩어리를 잡아 놓고 그 안에서 출력하면서 세부적인 변화를 줄 예정이라며.
폰트 페어링 접근법:
왜 교수님은 00체를 썼는가?
교수님이 현재 작업하는 책은 사전으로 분류된다. 현재 쓰고 있는 폰트는 견출명조(표제), 지백(정의), 정인자(본문)이다.
그 중에서도 교수님이 가장 먼저 고르는 건 본문 폰트라고 했다. 아무래도 책에서 가장 넓은 범위를 담당하기 때문. 글자 포인트가 8.5pt 로 작아졌을 때 글자의 표현(맺음, 삐침 같은 요소들)이 사라질 일이 적고, 그 외에 균형, 비례, 농도 등등을 고려해 봤을 때 정인자가 가장 무난한 선택이었다.
정의 부분은 서술체가 아니라, 그냥 한 단어나 문구 정도로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밝혀주기 때문에, 단호하게 딱 떨어지는 글자여야 한다는 판단으로 지백이 선정되었다. 분위기상 세리프 보다는 산세리프가 맞았고, 속공간을 크게 써서 전각을 꽉 채우는 꽤나 무뚝뚝한 글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한다.
견출명조는 특정한 시대가 연상되지 않는 글자이기에 선정되었다. 어느 순간 어떤 특출난 사람이 불쑥 만든 게 아니라, 조금씩 형태가 진화 발전하여 지금까지 잘 쓰고 있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글자체라 생각한다고. 그런 글자체를 쓰는 걸 지향하는 게 교수님 스타일인 것 같다.
“최정호 활자 이외에는 잘 안 쓰죠. 내가 만든 결과물 안에 인정할 수 없는 것들, 원본성이 되었든, 완성도가 되었든, 그런 인정 할 수 없는 걸 굳이 쓰고 싶지 않아요.”
창작자로서 각각의 스타일이 있을텐데, 교수님의 경우를 알아가는 기분이다. 다만 이건 교수님 책이라서 그렇고, 만약 외부에서 대중을 위해 쓰는 책을 의뢰받아서 쓴다면 또 다른 기준으로 작업을 할 거라고 하시긴 했다(내가 봤을 때는… 글의 내용은 몰라도 양식이 특별히 대중에게 다가가기에 어렵게 느껴지진 않는데, 나도 물들어 버린 걸까?).
표제, 정의, 본문에도 영문 병기가 되고 있긴 한데, 본문에서만 한글폰트에 들어가 있는 영문 폰트를 그대로 사용하셨다. 그래도 글의 흐름을 고려했을 때 영문을 따로 쓰지 않는 게 낫다는 판단으로 내린 선택이다.
*이전에 올렸던 좋은 폰트 가이드 섞어짜기 1편의 '가장 잘 섞어짜는 방법, 안 섞어짜기'를 보면 더 자세한 이유를 알 수 있다. https://brunch.co.kr/@writing-minju/87
폰트 페어링을 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면 좋을까요?
“크게 표현, 양식, 공간을 고려하면 될 거예요.”
ㄱ. 표현
둘이 어울린다고 얘기할 때 어떤 사람은 표현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삐침, 맺음, 부리, 돌기 같은 튀어나온 부분들을 위주로 보고 비슷한 표현이 있으니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지.
ㄴ. 역사적 양식
글자는 그 모양에 따라 저마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필서체와 인서체다. 어떤 기기가 발명되기 전에 우리는 손으로 글자를 썼다. 필서를 한 거다. 그래서 이런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필서체는 기울기가 있고, 획의 강약이 드러나고, 속공간이 작다. 특히 영어 소문자의 경우는 속공간의 편차가 크다.
반대로 인서체는 필서체의 손글씨와는 다르게 반듯하게 조각해 낸듯한 글자의 특성을 갖는다. 기울기를 수직과 수평으로 맞추고, 획의 굵기 변화를 없앴다. 속공간은 전체적으로 좀 더 큼직해졌다. 때문에 서로 같은 양식을 공유한 글자체는 세부적으로 들여다 봤을 때 다른 표현을 가졌다 해도, 붙여 놓았을 때 크게 이질감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ㄷ. 공간
글의 흐름이 균일해 보이기 위해서는 글자의 인상이 중요한데, 이 때 속공간도 그 인상을 크게 좌우하는 요소 중에 하나다. 공간이 큰 것과 작은 것을 한데 쓰면 작은 건 튀어나오거나 답답해 보일 수 있고, 공간이 큰 건 하얗게 비어 보일 수 있다. 대비를 줘서 강조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쓰는 거라면 섞어도 되지만, 그렇지 않고 멀리서 보았을 때 하나의 덩어리로 잘 묶이는 걸 원한다면 비슷한 속공간을 가진 걸 쓰는 게 좋다.
“예를들어 가라몬드로 영문을 쓰고 중명조로 한글을 쓰는 경우가 많아요. 둘 다 역사적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조화로운 면이 있죠. 그런데 가라몬드를 쓸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요. 속공간의 편차가 꽤 크다는 거죠.”
이렇게 교수님은 한글과 영문, 그리고 영문 안에서도 대문자와 소문자의 크기 차이도 좀 더 생각해서 봐야 하고, 그게 괜찮다면 하나의 양식으로 묶일 수 있는지를 보고, 그 다음에 표현을 생각해서 고른다고 하셨다.
“그런 영문을 고르기가 쉽지 않겠는데요?”
“고를만한 게 없다면 만들면 되죠.”
“... 얼마나 걸리는데요?”
“라틴은 뭐, 한 두 세달?”
쉽게 말씀하신 것 같지만, 실제로 한글 폰트를 만드는 것보다는 짧게 걸리는 게 맞다. 한글은 몇 천자를 그려야 하지만, 영문은 알파벳만 만들면 일단 기본은 한 거니까(물론 그것만 그리면 문장을 완성할 수 없지만 말이지). 그런데도 실제 한글에 맞춰 영문폰트를 만드는 시도가 적은 걸 교수님은 뭔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라틴 알파벳에 맞춰서 한글 폰트를 만드는 시도는 종종 있었는데, 왜 한글에 맞춰 영문을 만들지는 않는지…
“이 땅에서는 한글을 위한 라틴을 좀 그렸으면 좋겠어요. 모든 글자에 해야 한다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써 온 글자체들에 어울리는 라틴을 우리가 찾아보고, 논의하면 좋을텐데 말이죠.”
SIMPLE IS THE BEST?
내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중에 하나는 위계는 단순할 수록 좋다는 거였다. 읽는 사람으로서는 단순하고도 은근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이드해주는 서식들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런데 책을 만들면서 보니까, 그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더라. 무엇보다 스스로 원고도 쓰고 편집도 하면 자기도 모르게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자기가 쓴 글인 만큼 마음대로 편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틀에 내용을 잘라 맞춰버리는 거다. 어제 뭘 먹었는지도 까먹는데, 지난 달 내가 쓴 원고에서 막 쳐내는 건 일도 아니다.
“합목적적이어야죠. 단순한 게 그저 보기 편하다고 할 게 아니에요.”
작가가 쓰는 한 호흡이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면 굳이 위계를 나눠 넣고 빼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작가가 내용에 섬세한 차이를 줘서 구성했다면 또 그걸 시각화 해서 보여주는 것이 디자이너의 몫인 거다. 폰트를 고를 때 부터 그걸 얹어 내용을 보여줄 때도 모두, 내용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그걸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 위계를 잡을 수 있을까를 교수님께 여쭤보았다. 간단히 이야기를 하자면 위계를 잡을 땐 1) 흐름이 끊어져야 할 때는 끊어지게, 또 끊어지지 말아야 할 땐 끊어지지 않게 2) 목적에 맞게 구분이 되는 충분한 크기로 표현해 주는 것이 좋다. 3) 내용의 양을 고려해서 많이 설명해야 하는 것과 그냥 넘어가도 되는 것을 구별해 주는 것도 잊지 말고.
“이런 것들은 기능적인 접근인데, 저는 여기서 그치지 말고 조금 더 문화적인 맥락을 생각해 디자인에 적용해 보면 좋겠어요.”
교수님이 작업하고 있는 책에는 효종어필이 표제로 들어간 글이 나온다. 그러면 다른 표제 보다 일부러 윗 단에 두는 거다. 옛 고서에서부터 우리는 왕이 나오거나, 왕에 관련된 무언가를 다룰 때는 다른 것들 보다 높은 곳에 두고 글을 썼기 때문이라고. 일종의 사회적 질서가 반영된 결과랄까. 조형은 깨지지만, 애초에 이 책의 목적이 옛 한글 글자체의 모습과 역사를 다루고 있기에 충분히 반영할만한 관념적인 디자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때나 쓸 수는 없겠지만 잘 쓴다면 의미있는 디자인이 될 것 같아 보인다. 어디서 이런 맥락들을 건져 볼 수 있을까.
“꼭 책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시각화의 문화, 역사 속에서 다양한 질서를 볼 수 있다면, 그만큼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고를 수 있겠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면서 늘 기능만을 찾지는 않잖아요. 어떤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에겐 장난이고 실수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새로운 안경을 얻은 기분이다. 디자이너에겐 각각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 아니, 어쩌면 지향하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사실 폰트가이드를 쓰면서 A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B를 보십시오! 이렇게 뚜렷하고 쉽게 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한 편, 무언가 더 교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오늘은 그 지점에 비교적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다. 계속 공부를 하고, 어떤 가치를 지향해 보기도 하고, 시행착오를 거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기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 만큼 동기도 더 뚜렷하게 생기는 것 같다. 새로운 안경을 받았다. 잘 써 봐야지.
인터뷰 이용제 활자 디자이너
정리 신민주 에디터
디자인 김민기 그래픽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