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에 쓴 내 첫 악보는 괴담 속 편지 같았다

배운걸 적용하지 않아서 실력 향상 기회를 놓친 것이 부쩍 아쉽다

by Sayer

마음에 드는 음악을 기록하고 싶었던 5세 어린이

어린이집에 다니던 어느 날, 음악 시간에 배운 한 음악이 꽤 맘에 들었다.

유튜브나 MP3는커녕 1가구 1PC 환경도 아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음악을 찾아서 듣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생각날 때마다 직접 듣지 못한다면 내가 부르지 뭐. 이렇게 생각했다. 마음에 드는 그 음악을 잊고 싶지 않아서, 듣고 싶을 때마다 내 입으로라도 부르려고 기록을 하려 했다.



음에 대한 개념 없이 음악을 기록했던 방법

그런데, 문제는 그때 나는 '음이름, 계이름'에 대한 개념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기록을 해야 하나, 방 한 구석에 앉아서 오래 고민했다. 어린이집에서 노래 시간에 '아아아'하며 노래 준비했던 걸 떠올렸다. 스케일 연습 말이다. 그래서 '아'로 기록하기로 했다.


눈에 잘 띄었으면 했는지, '기록하자!'라고 마음먹은 뒤 잡은 필기구가 하필이면 빨간 크레파스였다. 빨간 크레파스로, 집에 있는 노트 한 구석에 큼직한 '아' 글자로만 한 바닥을 채웠다. ' 안 배웠어도 음악의 강세(강약)에 대한 감이 있었나 보다. 강박에는 좀 더 큰 '아'를 썼고, 약박에는 비교적으로 작은 '아'를 썼다.

이렇게 나름의 규칙대로, 새빨간 '아아아 아아아'로 당시 내 최애 음악을 기록했더니 굉장히 괴기했다.

무슨 괴담 속 저주 편지 같은 문서가 만들어졌다.


오직 리듬만 기록할 수 있던 때 적었던 첫 악보.

내 기억에 그 '괴담 문서' 같은 메모가 내 첫 악보였다.



피아노를 배우고 나서 달라졌던 점

기록하고 나서 여러 번 그 페이지를 펼쳐 흥얼거렸다. 그런데, 점점 보기에 무서워졌다. 얼마 뒤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괴담 문서 악보'가 정상적이지 않은 악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는 그 페이지를 잘 펼쳐보지 않았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계이름, 음이름 그리고 박자를 표기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피아노를 기준으로 악보를 배우다 보니, 오선지를 읽는 법. 높은음(주로 오른손으로 연주)과 낮은음(주로 왼손으로 연주) 개념 등 음악적 지식을 얻었다.

이론적으로 드디어 음과 리듬을, 오선지라는 틀에 정상적인 악보 형태로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여전히 내 맘대로 악보를 쓰던 과거의 나

나는 음이름, 박자 개념을 알게 된 후에도 오선지 악보 기록을 하지 않았다.

오선지가 아니라 한글로 쓰는 음이름과 띄어쓰기로 마음에 드는 음악을 기록했다.


마음에 드는 곡의 멜로디가 간단한 경우에는 수기를 남기지도 않았다. 피아노를 몇 번 두들기다 보면 멜로디가 손에 익어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멜로디가 길거나, 손에 잘 익지 않으면 그제야 필기구를 쥐고 기록했다. 한글 음이름을 메모해뒀다가 다시 듣고 싶을 때마다 직접 연주해서 들었다.


피아노를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음에 드는 음악을 오선지에 기록하는 연습을 했다면, 어땠을까?

악보를 작성하는 것이 익숙했을 것이다. 악보를 지금보다 더 빨리 읽는 수 있었을 것이다.

청음 실력이 더 늘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훈련했다면, 지금쯤은 길 가다가 음악을 듣고 집에 와서 바로 양손으로 완성된 연주를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모차르트가 악보 유출이 금지된 성당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그대로 외워서 악보로 베꼈다는 일화처럼 말이다.


'그랬을 수도 있는데...'라는 생각이 종종 들어, 요즘 부쩍 아쉽다.



커버 이미지 출처: Photo by Kelli McClintock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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