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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er Nov 26. 2023

무용수가 아님에도 가끔 발레 바를 하는 이유

내 몸 바로잡는데 몰입하느라 다른 것들은 다 잊게 된다.

프로 발레리나/리노들의 영상, 수 년째 발레를 하고 있는 취미 발레인들, 발레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바 영상을 보면 바 하는 것이 아주 쉬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에 속으면 안 된다. 그들은 오랫동안 자기 몸을 단련한 숙련가들이다. 나 같은 일반인은 바를 하는 순간 깨닫는다.

와, 내 몸 지금 정말 엉망이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


기분 나쁜 생각이 계속 맴도는 날이 있다. 불과 며칠 전에 내가 그랬다. 우연히 마주한 어떤 사건 때문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도, 읽고 싶던 책을 읽어도 머리에서 안 좋은 생각이 사라지지를 않아서 뭘 해야 쫓아낼 수 있을까 궁리했다. 이 에너지 예술로 승화하는 게 제격인데, 요즘은 매일 글을 쓰다 보니 글은 약발이 잘 안 들 것 같았다. 분명, 쓰면 쓸수록 악마를 소환할 것 같은, '아브라카다브라'처럼 흑마법과 같은 문장들을 대량 생산해 낼 것이 분명했다.

그럼 뭘 할까, 그래 자주 안 하던걸 해보자! 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을 점령한 채로, 바(barre)를 했다.


사진: Unsplash의Jill Marv


바를 한다,라는 말은 발레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발레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해 보면, 막대 형태의 손잡이를 지지대 삼아서 잡고 몸풀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블랙스완>을 보면, 주인공 니나가 오디션을 보던 와중에 릴리가 불쑥 들어온다. 오디션에 늦게 도착한 릴리에게 안무가가 *"가서 몸 풀고 있어(Go and get warm up)"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웜업, 몸을 푼다는 게 스트레칭을 포함해서 바를 하라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여기에서 릴리 대답이 압권이다. “괜찮아요, 지금 상태 좋아요(It’s okay. I’m good)”이라고 말한다. 매우 긴장한 채 오디션을 치르던 니나에 반해, 릴리는 중요한 오디션에 늦었으면서도 여유롭고 자유롭고 당당한 분위기를 풍긴다. 둘의 대비가 잘 보이는 초반 장면이라 정말 좋아하는 부분이다.


발레 브이로거들의 브이로그 단골 소재 또한 이 '바를 하는 모습'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매년 발레의 날이라고 해서 전 세계 발레 단체들이 자기네 단체의 단원들이 웜업 하는 모습과 작품 리허설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송출하는 날이 있다. 그날은 프로 발레리나/리노들의 웜업 하는 모습도 구경할 수 있다.


그런데, 웜업, 몸을 푼다는 말은 전문가들 입장에서나 들어맞는 단어다. 직접 해보면, 이게 왜 웜업이야? 이렇게 힘든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이 그러던데, 요즘따라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느낌이라면 플랭크를 해보라고. 그러면 시간 가는 게 더뎌지는 마법을 걸 수 있다고 말이다. 내 경험으로는 바 역시 마찬가지다. 발꿈치를 들고 중심 잡기를 할 때, 내 다리를 들어 올려 음악의 흐름에 따라 버틸 때마다 인셉션처럼, 인터스텔라처럼 시간의 흐름이 바뀌는 걸 경험할 수 있다. ㅋㅋㅋㅋㅋㅋ


김연아 전 선수 에세이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김연아 전 선수는 한참 선수생활을 할 때,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트레드밀을 한 시간을 뛰었다고 했다. 프로 체육인이 '뛴다'라고 한다면, 조깅이 아니라 정말 뛰는 것이었을 테다. 그런데 달리기가 어떻게 웜업이 될 수 있지? 엘리트 체육인의 신체능력은 정말 경이롭다. 발레에서는 바, 운동선수들은 러닝이 웜업이라는데, 이게 본 운동이지 어떻게 웜업이란 말인가? ㅋㅋㅋㅋㅋ

*트레드밀: 러닝머신.


아무튼, 더러운 기분을 다 불태워보자고 다짐하며 식탁 의자 하나를 빼 왔다. 그리고, 초급자를 위한 발레 바 영상을 틀었다. 35분 정도 되는 영상이었고, 아주 친절한 영상이었다. 따라 하는 사람을 위해서 순서를 천천히 알려주었고, 그다음에 왼쪽과 오른쪽 움직임을 진행했다. 다른 바 영상들은 너무 빠르거나, 한쪽 방향만 함께 움직여주고 다른 쪽 할 때는 음악만 나와서 따라 하기 힘들었는데, 마음에 드는 영상을 발견했다. ^^


바를 해보면 공감할 것이다. 처음부터 제대로 자세 잡기가 쉽지 않다. 가장 기초적인 플리에 동작부터 고생이 시작된다.

어깨는 턱과 멀어지게 쭉 내리고, 등을 펴고, 정수리에서 위로 뻗은 실을 천장에서 끌어올리는 느낌으로 목을 세운다.
팔은 바깥쪽으로 쭉 뻗는데 자기 신체구조상 가장 길어 보이는 모양을 잡아서 쭉 늘린다는 느낌으로 뻗는다.
손 끝은 약간 몸 안쪽으로 향하게 손목을 구부린다. 배는 집어넣는 방향으로 힘을 주고, 골반은 엉덩이가 뒤로 빠지지 않게 꼬리뼈가 바닥과 수직이 된다는 생각으로 자세 잡는다.
무릎과 발 끝의 방향은 같아야 한다.
발꿈치를 들 때는 애매하게 들지 말고, 바짝 들어 올린다. 중심을 잡을 때는 배와 등 근육(코어 근육)에 힘을 뽝 주고 음악의 흐름에 맞춰 끝까지 버틴다. 어떤 동작을 하더라도 끝까지 한다 그래야 부상이 방지되고, 실력도 는다.
그리고, 이것들을 한꺼번에 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힘쓰면서 '나는 아주 편안하게 동작을 하고 있어요'라는 표정연기를 한다.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몸의 구석구석에 신경 쓰면서 움직이다 보면 마음을 휩쓸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잊는다.

내 몸 하나 제대로 움직이게 하기도 바쁜데 그딴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저리 비켜! 라고 외치는 듯한 당당함! ㅋㅋㅋㅋㅋㅋ 바를 하면서 고통스럽기도 하고, 내 몸 상태에 대해서 절망하기도 하지만,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이런 당당함을 되찾게 하는 마력이 있어서 좋다.

음... 약간 영화 <마더> 속 '안 좋은 것들을 잊게 하는 혈자리' 현실판 같기도 하다. ㅋㅋㅋㅋ


바를 하고 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아주 대 성공이었다!

플리에를 거쳐, 힘겨운 퐁듀, 에너지가 넘치는 그랑바뜨망을 지나면서 부정적인 생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송골송골 땀 맺힌, 좀 지쳤지만 뿌듯한 나였다!


발레 바를 하고 나면, 몸이 데워져서 스트레칭도 더 잘 된다. 평소보다 다리 찢기, 옆구리 늘리기, 몸 앞으로 숙이기의 한계치가 늘어난다. 혹시 본인의 진정한 한계를 측정하고 싶다면, 바를 적극 추천한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바를 한 다음날까지 등과 어깨가 평소보다 곧다. 의식하지 않고도 평소보다 곧게 펴져 있다. 물론, 한 번만으로 아주 꼿꼿하게 제대로 된 자세나 외형으로 변하긴 어렵다. 하지만, 바를 하지 않았을 때와 하고 나서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차이가 느껴지다 보니 앉거나 서거나 활동을 할 때, 바른 자세에 대해 매우 신경을 쓰게 된다.


이번에도 '이게 왜 준비운동인가'라는 의문이 남았지만, 이로운 여운이 남는 즐거운 움직임이라는 생각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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