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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한 Feb 21. 2021

치통(齒痛)

미련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피곤할 때만 나타나는 어깨 통증은 방치한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아직도 이 통증은 목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어깨로부터인지 그 기원을 알지 못한다. 그저 자동차 핸들에 손을 올리는 것마저 극심한 통증이 찾아올 때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곤 한다. 

 고질적으로 찾아오는 허리디스크는 매번 아프고 난 다음 꼭 운동하겠다는 결심을 하지만 임시방편인 치료가 끝나면 고통이 없어졌다는 안도와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곤 한다. 상처에는 마데카솔을 바르지 않으니 몸 이곳저곳엔 잔 흉터들이 많다. 웬만큼 아파서는 즐거움의 쾌락을 누르지 못하니 아파도 놀자는 주의다. 미련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그래서인지 나 같은 사람은 아파도 웃기에 말해도 병자 취급을 해주지 않는다.

 반년 전부터 찬물을 마실 때마다 오른쪽 아래 어금니가 시리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곤 여러 달을 지나치다 보니 어느 순간 입을 찡그린 채 물을 마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시린 것이 더욱 심해져 오랜만에 치과를 찾았다. 엑스레이를 찍고 입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의사는 어금니에 균열이 갔다 한다. 아마도 많이 시렸을 텐데 왜 이제 왔냐고 타박이다. 치료비를 물어보니 오십만 원이라 한다. 몇 군데 더 알아볼 요량으로 알겠다 하곤 나와서 다시 두어 달이 지났다. 

 결국 이틀 전 탈이 나고 말았다. 밤새 치통 때문에 잠을 설쳤다. 설 연휴라 이틀은 더 지나야 병원을 갈 수가 있을 것이다. 타이레놀 한 알로 진정이 되는가 싶더니 저녁에는 입을 다물 수가 없고 얼굴의 전반이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씹을 수 없으니 하루 종일 강제 단식이고 빈속에 약만 먹어댔으니 속은 쓰렸다. 지금 속은 쓰리고 얼굴의 절반이 지끈거린다.

 혼자 나와 살다 보니 걱정을 해줄 사람 하나 없다. 시계를 보니 저녁 일곱 시가 조금 지나고 있다. 지금 잠자리에 들면 분명 새벽에 깰 것이다. 아마 그 이후는 치통으로 밤을 새우리라. 그저 지금 이 글의 몰입으로 조금이나마 고통이 가시길 기대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씹을 수 있는 즐거움에 대해 난생처음 생각하고 있다. 배고픔이 밀려오니 온갖 것들이 생각난다. 차가운 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서 팔뚝만 한 알타리 무를 와그작 깨물고 싶다. 아니면 대파를 쑹덩쑹덩 썰어 넣고 계란 한 개를 풀어 넣은 라면 한 그릇이라도 좋다. 

 먹어야 산다. 먹고살기 위해 이것을 삼켜야 노동을 해서 먹을 것을 먹는다. 먹을 것을 먹어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 이것을 목구멍 뒤로 넘겨야 하는데 극심한 치통 때문에 넘길 수가 없다. 죽는 날까지 먹어야 하는데 지금은 먹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죽음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섬뜩하다.

언젠가 친구들과 한 대화가 기억난다. A가 이야기했다.

“먹고살기 힘들어 죽겠다.”

그 말을 들은 B가 답했다.

“야. 말할 여력이 남았기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다. 진짜 힘든 사람은 힘들다는 이야기할 힘도 없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지금 나는 배고파 죽겠지만 아직은 죽을 만큼 배고프지 않기에 몇 자 옮겨 놓는다. 죽이라도 사서 먹으면 다행이지만 그것마저 귀찮아서 안 하고 있다. 아직은 살만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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