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있으면 말로 해.

눈에 힘주지 말고.

by 모도

한 손으로 우산을 들기 힘들 만큼 굵은 빗방울이 양동이 째 퍼붓는 날. 비를 뚫고 가는 곳엔 첫째가 있었다.

코로나와 독감이 유행이었던 그때, 첫째가 학교에서 열이 났다. 담임선생님이 조퇴처리를 한 후, 나에게 전화를 주셨고 놀란 마음에 첫째에게 전화를 했다.

"열난다며? 몸은 괜찮니?"

"네."

"어디야? 우리가 다니는 병원까지 혼자 올 수 있겠어?"

"네. 가고 있어요."

"그럼. 나도 바로 출발할게."

"........ 네."

아파서 그런 줄 알았다. 아이의 퉁명스러운 대답은.


병원에서 첫째를 보자마자 이마를 짚었고, 아이는 몸을 뒤로 뺐다. 교복을 입은 채로 병원에서 보니 의젓하고 멋져 보였다.

'언제 이렇게 컸나.' 생각하며 옆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다른 소파로 자리를 옮기는 아들.

'짜식, 부끄러운가.'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혼자만 재밌어했다.

다행히 코로나와 독감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고, 편도가 부어 열이 나는 거라며 약처방으로 진료는 끝이 났다. 보험회사 제출용 서류와 학교제출용 진료확인서를 발급해 달라 부탁하고 뒤를 돌아보니, 아이의 인상이 구겨졌다.

'왜 그러지? 목이 많이 아픈가?'

약국으로 가는 길에 몸이 많이 아프냐고 물었다. 아이는 묵묵부답.

선생님께 진료확인서 사진을 찍어서 보내줘야 한다고 말하니 눈을 흘기기만 할 뿐, 사진을 찍지 않았다.

'왜 또 이래? 진짜!!!'

입술을 힘을 줘, 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약국을 나오면서 더 이상 참지 못했고, 아이에게 다그쳤다.

"지금 무슨 태도야?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해. 눈에 힘주지 말고."

아이는 그제야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앞으로는 병원 혼자 다니고 싶어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자기 친구들도 병원 혼자 다닌다며,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말을 쏟아냈다. 아이의 말은 귀에 도착했고, 나는 마음으로 듣지 못했다.

"서류 챙길 것도 있고, 네가 안 챙겨 오면 엄마가 다시 또 와야 하니 같이 오는 게 편하잖아."

한숨을 푹 쉬며 아이는 나를 보던 눈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내 뒤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아이의 버릇없는 행동에 화가 났다. 애한테 너 혼자 집에 가라고 말하고, 먼저 발길을 옮겼다. 걷는 내내 서운했다. 서운하다 다시 화가 났다.

"아니, 두 번 세 번 올 일을 만들지 말자는 게 잘못이야?"

아이의 말을 이해해 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아이의 버릇없는 행동에 포커스를 맞췄다. 아이의 예의 없는 행동은 육아서에서 수 있었던 금쪽이를 보는 듯했다.


이대로 집으로 가면 또다시 아이에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할 것 같아, 무겁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동네를 크게 돌았다.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늘 듣기 좋은 ASMR이었는데, 이 날은 펑펑 우는 소리로 들렸다. 눈물이 중력의 힘을 받아 아래로 흘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목에선 낯선 곡소리가 났다. 한참을 걸었다. 늘 걷는 그 길이 이렇게 적막하고 외로운 길이었나?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이 축축했다. 운동화 속에 들어온 빗물이 차박차박 밟힐 정도가 되고서야, 슬슬 추워졌다. 집으로 가려고 발길을 돌렸을 때, 아무도 없는 인도가 내 처지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아무도 없다. 첫째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했는데, 그 길로 놀러 갔다는 생각에 추슬렀던 마음에 다시 불길이 솟았다.

"하...."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도어록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 가슴을 후벼 파던 아이가 비를 쫄딱 맞고 들어온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픈 애가 예비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3단 우산을 쓰고 내 뒤를 따라 걸었단다. "그냥요."

걷는 동안 흘리고 닦았던 눈물이 다시 차올랐다.


아이와 나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고, 째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시작했다.

자기를 애 취급하는 것 같아 싫었다고. 해볼 기회도 주지 않았으면서 필요한 서류를 제대로 못 챙길 거라고 단정 지으니 더 말하기 싫었단다. 자기 눈빛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됐다고. 일부러 한 게 아니란다.

아이는 내 뒤를 따라 걸었다. 당연히 집으로 갈 줄 알고 따라 걸었고, 나중엔 그냥 걸었단다. 가다 서다 반복하던 엄마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아이의 목소리를 가장 오래 들은 날이었다.


사춘기는 아이와 부모가 서로에게서 정서적 독립을 하는 시기라고 말한다.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과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동시에 느끼니 혼란스러운 건 아이도 마찬가지.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나도 몰라요.", "내 방에서 나가라고요."라는 표현도 이 시기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말하는 육아서를 볼 때마다 셀프 위안을 삼는다.

"그래, 우리 애만 그런 게 아니야. 이게 정상이래."

그래도 막상 내 아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마음은 무너진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괘씸한 생각에 원망도 해본다. 내 아이지만 내 아이가 아닌 것 같은 낯선 기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눈물, 콧물 쏟아내던 그날.

어린 시절, 내 손을 꼭 쥐고 나란히 걷던 첫째와 이별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