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툼에서의 회피
내 생각을 전달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자.
"또 그런다."
남편과 사소한 말다툼이 있거나, 친정 부모님의 잔소리가 시작되면 내 머릿속은 백지장이 된다.
상대의 말은 허공을 맴돌다 내 귀를 거쳐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기억 속에도 남지 않는 상태. 나는 영혼을 가출시킨다.
영혼 없는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 나와 이야기하던 사람은 이내 제 풀에 지쳐 자리를 뜨고 만다.
내가 다툼을 피하는 방법은 회피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엄마는 낮에 일을 했고, 밤엔 부업을 했다. 나는 동생을 돌보아야 했고, 동생은 천방지축이라 어디로 튈지 모를 아이였다. 책임감이 특출 나게 강했고, 착한 딸이고 싶었던 나는 매일 저녁 동생의 뒤를 쫓아다녔다. 친구와 놀고 싶은 것도 참았고, 만화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참고 쫓아다닌 남동생은 언제나 내 레이더망을 피해 다녔다. 늘 놓치는 건 내 몫이었고, 동생은 자유롭게 세상을 탐험했다.
동생을 놓치고 집으로 오는 길. 시멘트를 대충 바른 2층 집이 보일 때부터 마음은 두방망이질 쳤다.
'엄마한테 뭐라고 그러지.'
'엄마한테 혼날 텐데.'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그림만 그리느라 안 그래도 작은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최대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 인정받고 싶은 사람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가만히 서 있는 것.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은 지우개로 지웠고, 덜 상처받고 덜 아프기 위해 어린 나는 피하는 법을 터득했다.
순간의 아픔은 가셨지만, 다음 날부터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빠져들었다. 아픔을 피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더 아팠다.
'그렇게 말할걸.'
하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고 가슴에서 맴돌았다. 쌓이고 쌓인 말은 무겁게 남았고, 시간이 흘러도 돌에 새겨진 문구처럼 더욱 선명해졌다.
순간의 고통을 잊기 위해 선택한 벌로 긴 시간을 후회하며 사는 일. 회피.
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비슷한 상황이 되면 어느새 나는 머릿속을 비우고, 마음을 비운다.
그 날밤 꿈속에선 하지 못한 말을 수없이 반복하는 나를 만나게 된다.
자주 보게 될 사람이라면 증상은 더 심해진다. 얼굴을 볼 때마다 하지 못한 말이 떠오르고, 그때 상황을 곱씹게 되는 고문을 당하며 혼자 견뎌야 했다.
상대방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피했더니 내가 나를 괴롭히는 꼴이라니.
서로의 생각이 다른 데서 오는 언쟁이 늘 불편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상대의 말에 아팠고, 내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대화라는 것은 서로의 생각이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생각을 알아가는 것이라는데, 현실은 달랐다. 서로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하기 바빴고, 책 내용과 다른 현실은 또다시 회피를 선택하게 했다.
돌고 돌아 제자리걸음.
어쩌면 나도 상대방처럼 내 주장이 맞다고 외쳤을까. 그래서 상대방은 더욱 목소리를 키웠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쌓였던 감정이 분출됐을지도 모를 일. 꾹 참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말을 통해 전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을 말하자. 단순하고 임팩트 있게. 상대의 생각도 잘 듣고 있음을 표현하자. 적절한 리액션을 더해.
회피는 불편한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니 내 생각을 전달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들어주지 않을까. 내가 그들의 말을 들어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