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에서 아이를 놀리려면 이것저것 만지면 안 된다고 치우고 주의 줘야 할 것도 많지만 단지 공터에 아이를 데려다 놓으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장난감 없이 흙과 돌과 풀만 가지고도 아이는 지루한 줄 모르고 논다.
아이에게 집 안엔 없는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일 게다.
p171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태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20등, 30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지금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고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
p384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있고, 알맞은 촉광의 전기 스탠드가 있고, 그리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라도 할라치면 여왕님이 팔자를 바꾸쟤도 안 바꿀 것같이 행복해진다.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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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박완서 작가의 인생을 엿보는 것과 동시에,
70년대, 80년대, 90년대의 사회 모습을 생생한 실화를 통해 알 수 있다.
ㅡ남녀 차별.
ㅡ7080 세대의 대학 생활.
ㅡ시골뜨기도 서울뜨기도 못된 작가님의 이야기.
ㅡ가부장적인 가정 형태.
ㅡ시댁살이
이 외에도 사회적인 모습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사진 속 작가의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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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개인의 삶을 다양한 측면에서 소개한다.
작가의 자녀들을 키우며 느꼈던 이야기.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 속에는 실향민 이야기도 녹아있었다.
엄마로, 아내로, 작가로 살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 속에서 작가의 당차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 여실히 드러났다.
엉뚱하고 덜렁대는 작가님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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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에세이와는 확연히 다른 점들이 눈에 띈다.
ㅡ문장 자체가 길다.
앞 뒤 내용 연결을 어쩜 그리도 유려하게 하셨는지, 읽는 내내 감탄했다.
한 문장에 한 가지 팩트 밖에 못 적는 나에겐 그저 존경스럽기만 했다.
ㅡ한자어가 많이 쓰였다.
세대 차이가 주는 구수한 정이 느껴지는 문구가 많아 한자어가 불편하진 않았다.
ㅡ마지막으로 생각의 흐름대로 쓰인 글이다.
제목으로 내세운 이야기 외에도 그 장면에 등장한 다른 이야기들까지 함께 이어간다.
꼭 유럽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랄까.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다,
문득 바라본 병원에 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병원 앞에 선 임진각행 버스를 보며 실향민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 마무리하는 식이다.
한 주제로만 이야기하는 에세이에 익숙했기 때문에 다소 어색했다.
그것도 잠시,
이 이야기했다가, 저 이야기도 하는 친정 엄마 같아서 금세 적응하고 읽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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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게로 안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쓴 이야기 외에도 모든 글에서 작가님의 애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작가님은 자신의 삶 자체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모든 순간이 무게로 느껴지지 않았기에 웃을 수 있었고, 열정적일 수 있었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