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
어느 날 남편이 물었다.
"넌 뭘 좋아해?"
"나? 왜? 글쎄..."
"네가 끝장 볼 정도로 깊게 무언가를 파고들거나 좋아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발끈)꼭 그래야 하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발끈하긴 했지만 나는 남편의 물음에 선뜻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게 자존심까지 상할 일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나도 내세울 만한 취미 생활이 없다는 게 답답하고 속상했다. 얼마 전까지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돌고 돌아 고백하는데 나는 미술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미술 작품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미술관 가는 걸 아주 좋아하고 한국 고미술 작품이나 당대 화가에도 관심이 많다. 꾸준히 보는 미술잡지도 있고 그림 지식을 쌓으려고 미술 관련 책도 더러 본다. 미술 다큐 프로그램이 재밌다.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나 자신에게 의문이 생겼다. 좋아하는 분야가 있으면서 왜 서른이 넘도록 미술을 취미라고 말하지 못하고 쭈뼛대고만 있었는지 말이다. 나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이렇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도 많고 그림을 잘 아는 사람도 많다. 한 번도 미술 관련 정통 코스를 밟아본 적이 없는 내가 감히 그 많은 (준)전문가, 미술학도들 사이에서 미술을 말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고 치부했다. 실컷 그려놓고는 누가 내 그림을 볼까 봐 감췄다. 진짜 잘하는 사람들이 보면 아마추어 같은 내 그림이 얼마나 유치하겠나 싶어서 말이다.
그림이나 미술에 관해 소극적이었던 태도는 내가 독일에서 살면서부터 빠르게 사라졌다. 독일 어느 식당을 가도 벽에는 항상 그림이 걸려있었다. 형이상학적이고 심오한 그림이 아닌 일상의 그림들이었다. 우리가 동네에서 자주 가던 피자집이 있었는데 벽에는 캐주얼한 사진과 그림들이 너무 요란스럽지 않게 걸려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피자집 사장님이 취미로 그린 그림을 벽에 걸어놓는 것이라고 했다. 꼭 비싼 그림이 아니라도 그림 몇 점으로 공간의 분위기가 편해지고 아늑해질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독일에서 여행을 다니면서 미술관을 많이 다녔다. 여러 미술관을 보면서 나는 공간에서 오는 위압감보다는 편함과 여유로움, 그림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미술관은 덴마크 루이지애나 미술관이다. 미술관에 대한 인식이 독일생활 전후로 크게 달라졌다.
내가 자신 있게 그림을 그리고 공개하도록 태도가 바뀐 데는 남편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칭찬에 박한 남편이 유독 내가 그린 그림에 있어서 만큼은 열렬한 팬이 돼주었다. 그렇다고 항상 칭찬만 한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그린 그림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고 소중하게 대해줬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꾸준히 그림을 그리라고 지지하고 응원해 줬다. (한때는 같이 앉아서 그림을 그리던 알콩달콩한 시절도 있었다)
엄마가 되어 정신없이 육아하며 지내다 보니 '나 자신'은 점점 없어진다. 나 위주로 살아가기보다는 가족, 아이들, 남편 순으로 생각하다 보니 '나'는 점점 뒷전으로 밀린다. 본능적인 균형감각이 작동하면서 '내'가 더 이상 밀리면 안 되겠다 싶은지 이제야 나를 수면 위로 꺼내 올리려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도 이유도 없다. 내가 한평생 미술을 가까이하며 살고 싶다는데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인가.
"'나'야 눈치보지말고 그림을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