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中
행복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작가 #라이팅게일 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은 저의 지난 3개월간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나누려고 합니다.
폭설이 내리던 지난 1월의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저 구절이 제 가슴속으로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엔 한자를 제대로 보지 않고 시작이 Beginning인 줄 알았는데 다시 읽으니 시작(詩作)이더군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온몸으로 밀고 나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월의 어느 날 아침, 머릿속에서 난데없이 시구가 튀어오르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팝콘 터지듯 단어들이 튀어오르다니, 저는 그 자리에서 생전 써본 적 없는 시 두 개를 완성했습니다. 실로 황홀한 경험이었어요. 한동안 가슴이 뛰어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후 자연스레 공모전을 찾아보게 되었고 그렇게 창비 신인문학상에 닿았습니다.
엄청난 경험에 따른 설렘과 기쁨, 문학상 도전이라는 가슴 뛰는 동기 부여도 잠시, 이내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시를 쓰면 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이러다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단어가 튀어오르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체험은 진짜 신내림 같은 것이 아닐까, 너무너무 두려웠습니다.
정작 한자도 쓰지 못했지만 머릿속으로 시쓰기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머릿속으로 시를 구상하고 끊임없이 연구했죠. 물론 정작 쓰지 못하니 자괴감이 들긴 했지만요.
강렬한 체험으로 이끌고 말을 걸어준 김수영 시인의 책을 읽으며 그를 스승 대하듯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의 시와 책을 교과서 삼아 공부했어요. 물론 계속 시는 못 썼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마감일이 있는 5월이 되었죠. 매년 5월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인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음고생을 하며 패닉어택까지 맞이했습니다. 마감일이 지난 31일이었는데요, 1주일을 남기고 그간의 마음 고생을 보듬는 시간을 가졌죠. 여전히 시는 쓰지 못했습니다.
사실 마감일을 3일 앞두고 포기했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 자신을 괴롭힐 이유가 있나. 3일안에 5편의 시를 갑자기 어떻게 완성해요.
포기하고 나니 제게 말을 걸어준 김수영 시인에게 미안하더군요. 그를 떠올리며 그의 생애가 담긴 나무위키를 다시 읽고 있었어요.
그는 1921년에 태어나 68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전엔 무심코 지나친 부분이었는데 그는 술을 먹고 귀가하던 어느 날 버스에 치이는 사고가 있었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는 대목이 어쩐지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당시가 그의 전성기였다고 해요. 그의 대표작인 <풀>은 버스 사고가 나기 20일 전에 쓴 시인데, 그렇게 그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47살에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나다니, 그가 담담히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아니 그가 확실히 말을 걸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를 떠올리며 나를 찾아와 말 걸어준 건 고맙지만, 나는 두려움에 시를 쓰지 못하는 쫄보라고 그리고 그런 쫄보인 나 자신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그래서 창비에 보내지도 못할 것 같다고 이런 못난 사람이라 죄송하고 아직 나는 준비가 덜 된 것 같다는 내용의 사죄와 감사의 글을 쓰고 있었거든요.
지금의 제 남편보다 어렸던 그가 <풀>이란 시를 쓸 때 20일 후 버스 사고가 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을까요. 그 생각에 미치니 이번 창비 신인문학상이 제 생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생각은 김수영 시인의 메시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날 생각만 하고 시는 정작 쓰지도 못했는데요, 마감일이었던 금요일 오후 무언가에 홀린 듯 시 한 편을 뚝딱 지어내고 마지막 4편은 기존에 습작해둔 것을 대충 정리해 UPS 문 닫기 한 시간 전 가장 빠른 특송으로 보냈습니다. 이 모든 게 3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저는 지난 5월 30일부로 시인이 되었습니다. 당당히 말할 수 있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시 다섯편을 완성해 보냈으니까요. 이건 수상과는 상관 없습니다. 그간의 시간들은 알 껍질을 깨기 위한 몸부림, 땅 속 씨앗이 무겁디 무거운 흙을 뚫고 나오듯 저 또한 그랬습니다. 무척이나 기쁜 마음으로 그간의 여정을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미래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현재가 부족해 보여요. 뭘 하건 미래엔 더 나아질 게 분명할 거란 믿음이 강해 현재의 제가 너무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그래서 뭘 자꾸 미뤄요. 조금 더 시간을 들이면 나아지겠지 싶어서요.
지난 3개월간의 시쓰기가 제게 알려준 건 오늘이 내가 가진 유일한 기회라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시쓰기는 머릿속으로는 근사한 단어들이 쏟아지는 것 같은데 막상 글로 옮겨내면 유치하기 짝이 없더군요. 창피해서 눈뜨고 못봐주겠는 그런 글들을 보내긴 어렵겠더라구요.
오늘의 나는 과거에 비해 나이가 많고 미래와 비교해 내 시는 초보겠지만 그날의 저는 제가 쓸 수 있는 수준만큼의 시를 썼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내가 만들어낼 수 있었던 최고의 걸작이었고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저는 이제 오늘을 과거 혹은 미래와 비교하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리고 그저 오늘의 기회에 감사하며 최대한 누리려고요. 그날 이후 계획하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런 일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무심히 해버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엔 달디 단 잠을 잤습니다. 정말인지 괴롭고 두렵고 처절했던 3개월이었지만 한 뼘 성장한 시간이었습니다.
유일한 기회인 오늘을 맘껏 누리시는 하루 되시길 마음 가득 응원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팅게일 드림
P.S 예전 같았으면 한동안 묵혀뒀을 이번 글을 무심히 여러분께 들려드립니다. 모든일에 큰 의미 두지 않고 나아가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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