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
초등학교 5학년, 새로운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떠올려보면 갓 학교를 졸업하고 부임한 병아리 선생님이셨던 것 같아요.
또렷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단정하고 예쁘고 젊었습니다.
저는 예쁘고 반짝거리는 걸 좋아합니다. 그동안 봐온 선생님들과는 차원이 다른 반짝임.
너무 좋았죠. 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현주야, 이 종이 친구들한테 한 장씩 나눠줄래?"
선생님을 도울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
가정방문하는 날, 천안 지리를 모르는 선생님을 친구네 집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안 계셨어요. 친구와 동생은 차가운 방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 연락할 방법이 없었죠.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저녁을 먹었는지 확인하시더니,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가셨어요.
석유 곤로가 부엌 중앙에 놓여 있었습니다. 미닫이 찬장에는 몇 개 되지 않는 그릇이 엎어져 있었고요.
대접에는 밥이 한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마땅한 반찬도 없었어요.
어디서 구하셨는지 선생님 손에 들려있는 감자 나서 너 알. 껍질을 벗기고 깍둑썰기를 했습니다.
고추장 한 숟가락을 떠 넣고, 식용유를 둘러 감자를 볶기 시작했어요.
기름이 달궈지며 고소하고 달달한 감자볶음 냄새가 부엌 가득 퍼졌습니다.
차갑던 공기가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 같았어요.
꼬르륵, 배가 요동쳤습니다. 민망해서 웃음을 터뜨렸죠. 선생님도 같이 웃으셨습니다.
그 웃음이 어찌나 화사하던지요. 선생님 덕분에 처음 와본 남의 집 부엌인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변변한 반찬이 없었지만,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직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비좁은 부엌에서 감자를 볶던 선생님의 뒷모습. 아무 말 없이 그냥 들어가서, 아무렇지 않게 밥을 차려내던 그 손길. 선생님이 직접 반찬을 만드셨다는 것.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따뜻한 밥만큼이나 따뜻한 정이 느껴졌어요.
"와, 나도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처음으로 꿈이 생긴 날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꿈이 피어나게 만든 병아리 선생님. 아마 그날의 일을 기억조차 못 하실 거예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장면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다정한 선생님의 힘입니다.
2022년 1월.
"이현주, 너 내일 죽는다면 가장 후회되는 게 뭐야?"
그 한 마디 질문으로 글쓰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이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네이버에 검색했습니다. 찾아낸 글쓰기·책쓰기 강의, '이은대 자이언트 북 컨설팅'.
다른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운명이 되었던 날.
그해 12월, 자이언트 북 컨설팅 평생회원이 되었습니다.
이은대 사부님은 수업 때마다 말합니다.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요.
글 잘 쓰는 것보다, 베스트셀러 작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잘 쓰고 싶은 욕심,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습니다.
[자이언트 북 컨설팅]의 슬로건은 이렇습니다.
"내 삶을 글에 담아 세상을 이롭게 하는 책을 펴낸다."
그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어느 날 "내 안의 빛나는 글, 세상과 연결합니다." 란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글빛이음]의 슬로건이 태어난 날이었습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는다더니, 정말이었습니다.
덕분에 제 그릇이 조금씩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사람다운 사람, 어른다운 어른으로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이은대 사부님 덕분에 작가의 꿈도 이루었고, 강사의 꿈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감자볶음 한 접시에서 피어난 꿈이
수십 년의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이렇게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귀한 인연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신기합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생각할수록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사람인가.
나는 누군가의 삶에 어떤 장면으로 남을 것인가.
질문에 답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병아리 선생님이 차가운 부엌에서 감자를 볶으며 보여준 것처럼,
거창한 말이 아니라 따뜻한 행동 하나가 누군가의 평생 꿈이 됩니다.
나의 오늘 하루가, 누군가에게 그런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