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김치 김밥.
작년 1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가 떠나셨다. 처음부터 치매는 아니었다. 할머니가 방 안에서 넘어지면서 엉치뼈가 부러졌다. 연세가 많아서 치료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길어진 시간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갑자기 치매가 왔다. 병문안을 가도 점차 가족들을 알아보질 못했다. 알아본다고 하더라고 그 시간은 5분을 넘지 못했다. 점차 병세가 안 좋아졌다. 가족을 아예 기억을 못 했다. 마지막까지 기억을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장남인 우리 아버지도 기억을 못 하셨지만 이상하게 할머니는 막내 손주인 '나'는 기억을 했다. 하지만 그 기억도 오래가진 못했다. 결국 모든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가장 사랑하던 막내 손자인 '나'조차도.
치매라는 병은 아주 잔인하다. 아프거나 통증이 다른 병만큼 심한 것은 아니다. 식사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암처럼 고통스러운 치료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치매는 환자를 외롭게 만들고 가족들에게 상실감을 준다. 아무도 기억을 못 하고 옛 기억만 가지고 있어서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마지막에는 누구냐고 묻는다. 치매 환자는 과거에 살고 있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보고 아저씨 혹은 삼촌이라고 불렀고 어머니를 이모라고 불렀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할머니보다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 머릿속에는 아버지는 30대 정도고 손자인 나를 5살 정도로 기억한다. 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나는 병문안을 가서 "할머니, 동훈이 왔어요. 막내 손자."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할머니는 "우리 동훈이 작아요. 안 커요."라고 답하신다. 그리고는 할머니의 젊었을 때 얘기를 한다. 이런 행동은 다른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작은 아버지, 고모 모두한테 다 똑같다. 이 상황이 반복되면 아들, 딸 할 것 없이 발길이 자연스레 끊긴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할머니에게 병문안을 자주 갔다. 아마 아버지 형제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기억을 못 하더라도 간식을 사 가지고 갔고 나도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할머니가 위독하시니 오늘 밤에 병문안을 가보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집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갈 준비를 다하고 나서 아버지께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나는 할머니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안 간 건지 못 간 건지 아직도 헷갈린다. 불행하게도 할머니의 장례식은 아들의 출산 예정일과 가까웠다. 출산 예정일은 할머니 장례식 대략 2주 후 정도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나에게 전활 걸었다.
"동훈아, 너는 할머니 장례식에 오지 마라. 안 오는 게 좋겠다. 할머니도 이해하실 거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 생각과 아내 뱃속에 있는 아기 생각이 교차했다. 결국 안 가기로 결정했다. 어떤 사람들은 신경을 안 쓴다고 하지만 우리 가족은 달랐다. 대신 나는 가장 친구들을 보냈다. 조금 어이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정작 나는 '나'의 할머니 장례식을 못 가고 친구들이 간다는 게 조금은 이상했다. 갔다 온 친구들에게 어떠냐고 물어봤다. 부모님에게 물어봐야 괜찮다고 말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괜찮다고 했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도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마치 할머니가 해외여행 가신 것 같은 느낌이다. 장례식이라는 작별 인사를 안 해서 아직도 할머니는 지구 어디쯤에 살고 있을 것 같다.
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나를 이뻐했다. 큰손자인 형보다 나를 더 이뻐하셨는데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할머니와 20년 가까이 같이 자서 그럴 수도 있다. 원래 살던 우리 집은 작은 방이 세 개가 있었다. 방하나는 아버지가 쓰고 다른 하나는 엄마, 나머지는 형이 썼다. 그래서 할머니와 20년 가까이 같이 잠을 잤다. 나와 할머니는 27년 정도 같이 살았다. 할머니가 입원하면서 같이 지내질 못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바쁘셨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바빴다. 할머니는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키워주셨다. 할머니가 병원 입원하기 전까지.
할머니는 나에게는 부모님 이상이었다. 어렸을 때 어버이 날이면 나는 무조건 할머니 카네이션을 가장 큰 것으로 샀다. 아버지, 어머니 꽃은 안 사도 할머니 꽃은 샀다. 학교 방과 후에 비가 오는 날이면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서 계셨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도착해도 반겨주는 것은 할머니뿐이었다. 형과는 나이 차이가 꽤 나서 형보다 할머니와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할머니가 연세를 많이 드신 후에는 내가 보호자 역할을 많이 했다. 할머니 병원도 같이 다녔다. 병원이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보호자가 필요했다. 중고등학생일 때는 할머니가 집에 혼자 계셔서 수업 끝나고 일찍 들어갔다. 딱히 특별한 일이 있지는 않은 이상 집에 들어가서 할머니와 시간을 보냈다. 나에겐 할머니가 '나에 대한 기억'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
어렸을 때 살던 곳은 정릉이었다. 산동네에 작은 집에서 20년 정도 살았다. 중국집 배달도 잘 안 오는 동네였다. 동네 슈퍼 마켓도 거의 없었다. 먹을 것을 사거나 장을 보려면 10~15분 정도 내려가서 사 와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자주 하지는 못했다. 동네가 산동네였고 길도 험한 편이었다. 심지어 우리 집 앞 계단은 꽤 많고 길었다. 내 기억상 계단 70개 정도 됐다. 다른 길도 그리 편한 편도 아니었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가 자주 장 보러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동네가 그렇다 보니 우리 집은 짜장면 하나도 시켜먹기 불편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장본 재료로 직접 해 먹는 일이 많았다.
우리 집은 식탁이 없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접혀있던 나무 밥상을 폈다. 밥상을 피고 가족끼리 둥글게 앉아서 식사를 했다. 아침 식사는 예외였는데 아버지가 출근하시기 때문에 식사를 일찍 하셨다. 아버지가 출근하고 나와 형은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어렸을 때 나와 형은 아침밥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서운 아버지도 안 계시고 아침 입맛도 없으니 당연히 먹기 싫어했다. 텔레비전을 틀어 놓곤 밥상에 멍하니 앉아있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김치 김밥'을 만들어주셨다.
김치 김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김치 비빔밥을 만들고 그걸 김을 싸서 만들면 된다. 김치 비빔밥을 만드는 방법은 더 간단하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밥을 지었다. 전기밥솥이 있음에도 할머니 압력 밥솥으로 밥을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갓 지은 밥이 가장 맛있다. 할머니는 뜨거운 흰밥을 널찍한 밥그릇에 담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셨다. 겉절이나 덜 익은 김치가 아닌 꼭 푹 익은 김치를 쓰셨다.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를 나무 도마 위에 올리고 작게 자르셨다. 가끔은 김치를 볶아서 만드시기도 하셨다. 잘 썰어진 김치를 뜨거운 밥에 올리셨다. 그리고 거기에 맛소금을 조금 뿌리고 간장도 약간 넣으셨다. 어느 정도 비벼진 후에는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마무리하셨다. 그 상태로 먹는 것도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한 것은 김으로 싸주셨을 때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침을 먹을 때가 많았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으로 어린이 영상을 볼 수 없을 때였다. 그래서 아침을 먹을 때 '딩동댕' '하나 둘 셋' 같은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거의 항상 텔레비전을 켰다. 형과 나는 밥에는 신경도 쓰질 않고 텔레비전에 몰두했다. 그때 할머니는 잘 비벼진 비빔밥을 김으로 싸주셨다. 김으로 싼 다음에 밥상 가장자리에 하나씩 올려두셨다. 어렸을 때 기차 김밥이라고 했었다. 마치 기차 모양처럼 줄지어 있어서 나는 줄곧 그렇게 불렀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손으로 조그만 김밥을 쥐고 하나씩 먹을 수 있었다.
김치 김밥은 내 입에는 맛있었다. 김치 김밥에 들어가는 김치는 할머니가 직접 담근 김치였다. 시원하고 아삭하고 청량감이 있는 김치였다. 우리 집은 김치 냉장고 없어서 장독대에 김치를 보관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참기름도 단골 방앗간에서 짠 기름이다. 유독 단골 방앗간에서 짠 참기름이 더 고소했다. 요즘엔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직접 짠 것이 훨씬 맛있다. 그리고 할머니는 김밥을 싸기 전에 김을 구우셨다. 눅눅해진 김이라도 불에 구우면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굽고 나면 바삭해져서 식감이 더욱 좋다. 김을 굽고 나면 대충 가위로 한입 크기로 자르셨다. 시원하고 아삭한 김치, 갓 지은 흰쌀밥, 직접 짠 참기름에 소금간만 해도 정말 맛있었다. 아삭하면서도 새콤한 맛도 있고 갓 지은 흰 밥은 약간 단맛까지도 느껴졌다. 마지막 참기름은 모든 것을 아우른다. 여기에 김까지 싸면 화룡점정. 김은 이 요리에 감칠맛을 더해준다. 김치 비빔밥에 김을 싸서 한입 넣으면 내가 좋아하는 한식의 맛이 다 들어있다. 김치, 밥, 참기름 그리고 김. 이 네 가지 식재료가 한식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 아들이 아침을 먹고 있다. 가끔 아들 녀석이 밥투정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이상하게 잘 먹던 밥도 잘 안 먹는다. 그럴 때 아내가 아기용을 김을 꺼내온다. 김을 몇 장 꺼내서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로 밥을 김에 싸준다. 별로 특이할 것이 없다. 김을 싸주면 희한하게 밥을 잘 먹는다. 아내는 지우 밥상 위에 차곡차곡 김밥을 만들어준다. 그러면 아들이 신나서 양손에 김밥을 쥐고 혼잣말을 해가면서 먹는다. 아들이 아내가 싸준 김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 어렸을 때 나의 모습이 보는 것 같다. 나와 가장 닮기도 해서 더욱 그렇게 보인다. 김으로 싸주기만 해도 투정 없이 먹는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다. 먹는 아들의 모습과 어릴 때 나의 모습, 할머니의 모습과 지금의 나의 모습이 겹쳐서 보인다.
김밥을 먹는 아들 보며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다. 우리 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밥을 만들어주셨을까. 어떤 표정이셨을까. 지금의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간다. 할머니가 치매를 오랫동안 앓아서 할머니와 정상적인 대화 한지가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할머니랑 얘기를 해보고 싶다. 내 기억상 가장 젊었던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원래 우리가 살던 정릉 집 마당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 그리고 꼭 할머니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키어주셔서 고맙다고. 나도 나와 닮은 아들 낳아서 잘 키우고 있다고. 할머니가 해준 밥 꼭 한번 더 먹고 싶다고. 이 말들을 꼭 하고 싶다. 나를 기억하는 할머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