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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May 05. 2023

마음은 최정상, 몸은 바닥

[시간 순번 14]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이 떠올랐다.


 ‘임산부 좌석은 비워두시고, 배가 나오지 않은 초기 임산부도 앉을 수 있게 배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배가 나오지 않은 초기 임산부.

나다. 그것도 매우 극 초기.


친한 친구가 출산을 할 때까지도 몰랐던 그 사실을 내 온몸으로 느꼈다. 배도 나오지 않을 정도 초기 임산부도 몸이 매우 힘들다는 걸.     


 영하 17도까지 내려간 춥다 못해 통각이 마비된듯한 설 연휴 날 아침이다. 엄마가 만드시는 명절 음식 일부를 싸 들고 아지트로 향했다.

나는 내 집이 따로 있다.


평일에는 회사가 가까운 부모님 댁에 머물러 출퇴근한다.

주말이나 휴일에만 내 공간을 찾아간다. 덕분에 따뜻하고 정성 가득한 엄마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     


 명절이면 친척들과 차례를 지내야 하지만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저녁 8시만 돼도 열을 오래 가한 야채처럼 흐느적거리다 잠드는 날이 일주일째다. 대략 하루 11시간을 잠자거나 누워 있다. 돌쟁이 아기도 아니고.      


 내 집에서 생활은 아주 편하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 양치질하고 뭔가를 챙겨 먹는다.  

TV 켜고 연휴에 몰아서 하는 음식 먹방을 종일 틀어놓는다. 대리 만족이다.

남이 먹는 걸 보며 나도 저걸 먹으러 베트남, 이탈리아, 포르투갈, 터키, 그리스, 중국에 가보겠다고 즐거운 상상을 한다.

저녁이 되면 엄마가 싸주신 음식을 데워 먹는다. 해가 짧은 겨울이라 다행이다. 누군가는 서로의 지인을 만나러 외출할 수도 있는 초저녁 시간에 잠자러 눕는다.     


 힘이 거의 필요 없는 생활을 3박 4일간 즐겼다. 임신 5주 3일 차라고 한다.

바닥과 한 몸이 되어 몸은 이불 위에 딱 붙어있다.


  몸은 이렇지만 마음은 너무 기뻤다.

저렇게 생활하다 연휴 마지막 날 집에 와서 부모님께 세배하며 ‘나 임신했어~’라는 말을 속으로 외쳤다.

너무 초기라 남편 외에는 알리지 않았던 때다.  

9개월 후면 나와 남편을 반 씩 가지고 태어난 아가와 함께한다.

집 모양으로 생겨 아기가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의 장난감은 꼭 사 줘야지, 방에는 넘어져도 다치지 않게 매트를 깔고, 아기 방에는 주방, 책상, 병원, 도서관, 인형놀이, 로봇까지 다 갖춰 줘야지. 별의별 상상을 다 해본다. 벌써 애 다 낳은 것 같다.    

  

 저출산으로 유아 관련 산업이 사양 산업이 될 거라는 말이 깨진 지 오래다.

아이를 적게 낳고 낳은 아이 하나에게 모든 걸 쏟아붓고 싶은 건 나뿐이 아닐 거다.

곧 나도 소위 말하는 ‘열성 엄마가 되겠지’ 생각만 해도 너무 신난다. 그렇게 몸은 바닥에 붙어 있지만 마음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말 참 쉽게 해 왔다.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모르기도 하는 말이다. 뭘 알고 뭘 알지 못한단 말인가.

세상일을 다 겪어볼 수도 없지만, 겪어봤다고 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하지만 이거 하나는 꼭 알겠더라. 배가 나오건 안 나오건 임산부는 어느 시기라도 다 힘들겠구나.     


 가방 한쪽 구석 수줍게 달고 있는 분홍색 배지만으로 임신 여성이지 구별할 수 있는 초기 임산부.


내 친구가 그랬고 내 가족이, 직장 동료가, 후배가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들이. 모두가 배려받고 싶었을 것이다.

가까이 있음에도 그들의 힘듦을 몰랐던 내가 이렇게 알아 간다.      


 20대 때 결혼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해줬다.


“연애할 때는 무슨 말을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혼 때는 서로 알아가느라 시간 금방 가는데,

10년쯤 지나니까 애들 얘기 아니면 할 말이 확 줄어든다.”


무슨 부부 소재 예능 프로그램 대사도 아니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왜 이러나 하는 생각에 그때 피식 웃었다.

지금은 또 하나 알았다. 결혼 10년 차가 넘어가는 친구 말이 틀린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부모가 되려고 하는데 이유가 없다. 부모가 되어야만 한다.


그 생각 하나로 시험관 시술이라는 길을 걷고 있다.

이 생각은 한 번도 변한 적 없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는다.

세포 하나하나에 새겨 있는 내 가치관이다.


힘들어서 이러고 있긴 하지만 바닥에 딱 붙어 있는 나처럼. 태아도 세상에 나오는 날까지 내게 딱 붙어있길.    

 

#5주3일차 #임신극초기 #5주차임산부 #초기임산부 #바닥과한몸 #마음은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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