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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Oct 25. 2023

난임 환자의 오사카 여행(3)

아리가또고자이마쓰

도톤보리 거리는 인파로 넘쳤다. 가이드가 글리코상 전광판까지는 데려다줬는데 한 시간 반 정도는 알아서 돌아다니다 지정 장소로 오라고 한다. 드디어 혼여가 시작되었다. 앞뒤 좌우로 그득한 사람들은 빨리 갈래야 갈 수가 없게 만들었다. 조급해하는 성격이어서 시간 안에 뭐라도 보려면 빠른 걸음으로 가고 싶은데 그게 안된다. 인파 사이에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생기면 또 누군가 끼어들어 여유 있는 발걸음이 될 수가 없다. 빨리 걷는 건 포기하고 휘황찬란한 오사카 간판을 사진 찍으며 걷는데 비행기 타기 전 제대로 못 먹은 고픈 배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먹는 상점들도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유명한 데는 대기가 똬리를 틀고 있어 주어진 시간 안에 기다리고 먹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별로 안 유명한 음식점은 메뉴판이 전부 일본어여서 용기가 안 난다. 돌아다니다 결국 한국어로 한 접시 143엔이라고 쓰여있는 회전초밥 집 앞이 사람이 별로 없어서 기다리게 됐다. 그것도 20분 정도 대기했으니 짧은 시간은 아니다. 기다리다 어느 순간 뒤를 보니 순식간에 뒤로 줄이 늘어선 게 운이 좋았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어렵게 한 자리가 나서 앉아 빙빙 돌아가는 초밥 중 비싼 것 제외하고 143엔짜리만 일곱 접시 먹고 일어났다. 주꾸미, 한치, 장어 이런 것들이다. 한국어 지원하는 가게여서 식사부터 결제까지 어려운 게 없었다. 다만 와사비가 회전 레일 위에서 돌고 있는데 무료인지 돈 내는 건지도 모르겠고 테이블 위에 와사비 색깔 나는 가루가 있어 그걸 간장에 타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눈앞에 한국어로 친절하게도 와사비 색깔 가루는 녹차 가루라고 쓰여 있었는데도 못 본 건 긴장한 탓이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으니 편안히 앉으면 보일 안내문도 눈에 안 들어온다.


와사비 가루처럼 생긴 걸 한 스푼 떠서 간장에 타자 찐득해졌고 거기에 초밥을 찍어 먹자 구수한 맛이 났다. 일본 와사비는 구수한 줄 알았다. 양 옆에 앉은 사람들이 레일 위에 와사비를 세 개, 네 개 집어 간장에 타는 걸 보는 순간 깨달았다. 와사비는 나라마다 맛이 다르지 않나 보구나. 내가 먹은 건 와사비가 아니면 무엇일까. 그래서 한국어로도 써 놓았습니다 손님… 녹차 가루라고요.


어쨌든 눈치껏 와시비는 돈을 내는 게 아니란 걸 알고 내 앞으로 와사비가 지나갈 때 냉큼 하나 집어 간장에 탔다. 스시를 와사비장에 찍어 먹는 순간 드디어 제대로 된 일본 초밥을 먹은 것이다. 7년 만에 한국을 떠나니 바싹 긴장했고, 난임으로 서글퍼 있는 심리는 더 움츠려 들게 만들어 놓았다. 전혀 할 줄 모르는 일본어를 극복하고 첫 끼니를 먹으려니 운동 후 근육이 경직된 것처럼 몸이 굳어 다각도로 생각할 줄 모르는 상태다. 일본에서 첫 식사를 회상하자면 그러했다.


친절한 일본 가게 점원은 먹은 접시를 쌓아놓고 움찔움찔 의자에서 내려오는 날 보고 다 먹었냐는 느낌의 일본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을 한 것 같다. 영어로 짧게 Finish라고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르바이트생은 접시 수를 세었다. 그 사이에 카운터로 와서 계산을 기다리자 캐쉬어느 계산대에 빠르게 1,001 엔이라고 보여주었다. 아! 역시 와사비는 무료구나!


1000엔짜리도 있고 1엔 짜리도 있어서 거스름돈 받을 필요 없이 결제를 하고 외쳤다.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리가또고자이마쓰”

남편이 일본 가면 많이 해야 하는 말이라고 오기 전에 연습시킨 유일한 일본어였다. 일본에서 현지인에게 말문을 튼 첫마디. 아리가또고자이마쓰.

고맙게도 캐쉬어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눈도 살짝 위아래로 찌그러뜨려 웃음 치며 화답했다. 아리가또고자이마쓰 라고.


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내게 얼마나 자신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내가 타국에 왔다. 언어가 전혀 되지 않는 곳이다. 누군가와 소통했다. 그녀가 내게 답해주었다. 유유히 식당에서 걸어 나왔다. 이제 나는 밥 정도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감이 솟구쳤다.

내일도 모레도 먹을 걸 사 먹어야지. 아리가또 고자이마쓰라고 하면 상대가 날 보고 웃어주는구나. 이 말을 또 해야겠다.


난임으로 자신을 잃은 여자에게 힘을 주는 사건이었다. 스시 일곱 접시는 부족했는지 새벽부터 배가 쫄쫄 고파왔지만 전 날 있었던 이 일만은 떠올려지며 웃음 짓게 했다. 광관지 유명 음식점에 근무하는 점원이 외국 손님에게 보여준 소소한 미소와 말 한마디. 어느 나라에서든 볼 수 있는 이 풍경이 나를 희망에 젖게 했다. 밤 동안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일을 떠올리며 행복해했다.


적어도 아침에 먹은 호텔 조식이 또 긴장한 탓에 배탈로 이어지기 전까지 나를 울상 짓게 하는 일은 없었다. 아, 조식은 왜 탈이 났냐면, 오전 7시부터 시작되는 아침 식사를 좀 더 일찍 먹고 빨리 나가보려 했던 탓에 급하게 먹었다. 남들보다 일찍 나가야 일찍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그날은 여행사에 일정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돌아다니는 자유 일정 날이었기에 급했다. 그렇게 발동한 조급증은 밥도 욱여넣게 했고 20분 정도 먹어갈 때쯤 배에서 꾸르륵 소리를 듣게 했다. 좋지 않은 징조를 예감케 했다. 후에 가이드가 내 배탈 소식을 들었을 때 아침에 먹은 낫또가 몸에 나쁜 독소를 빼내준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자유 일정에 긴장한 몸과 마음이 소화를 돕는 효소 분비를 방해한 것뿐이다.


겁 많고 조급증 있는 사람이라 어둑어둑해지면 밖에 돌아다니기 무섭겠다는 생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서 날 밝은 시간에 숙소에 돌아오고 싶었다. 남들보다 더 이른 시간인 7시 45분에 전철역으로 향하는 호텔 셔틀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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