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첫 메트로 탑승
일본 지하철은 매우 복잡하다는 말을 들어서 오기 전부터 한껏 긴장했다. 이 날 메트로 미도스지 라인을 타고 난바역에 가야 하는데 떨리고 무서웠다. 그래서 아침 먹은 게 탈 난 것이다. 간헐적으로 통증이 오는 묵직한 배를 안고 전철 표를 구입했다. 한글 지원이 돼서 전혀 어렵지가 않았다. 한국에서 메트로 일일 이용권을 사서 올까 했는데 교환처 찾기가 무척 어려우니 사지 말라는 여행사 직원 말 듣기 잘했다. 일본에서 전철표 사기란 그야말로 한글만 읽을 줄 알면 가능하다.
신기하다. 타국에서 국어를 아는 것만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게.
지하철 내 방송이 나오긴 하는데 소음도 심하고 영어고 일어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구글 맵에 의존하여 도착하는 역마다 몇 번 남았는지 세어가며 타고 있는데 여전히 배는 폭발적인 꾸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말 작은 일이 아니군. 집에 있어도 이런 상태면 편안하지 않은데 일본에서 전철을 타며 배가 아프다니. 빨리 내리기만을 바랬다.
전철 정류장 하나를 도착할 때마다 앞으로 몇 개를 더 가야 내릴지 확인해 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타이 세미 정장 차림 남자들, 셔츠 목 단추 하나씩 풀고 스마트폰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은 손잡이를 꽉 잡고 있다. 흔들리는 전철 리듬에 맞춰 몸도 앞뒤로 가벼운 춤을 추듯 흔들거리며 일터로 향하고 있는 모습은 한국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거나 그대로 풀어놓은 상태로 폴리에스테르 치마에 블라우스 같은 걸 입고 있는 여자들도 하나 같이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나 회사 다닐 때 모습과 비슷하다. 주변에 외국인이 있건 없건 오전 여덟 시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네, 내릴 때 되면 알아서 내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우메다역과 신사이바시 등에서 많이 내렸다. 일곱 정거장 밖에 안 가기 때문에 그 이상 볼 수도 없었지만 그 역들이 환승 노선이 많이 교차하고 주변이 번화가여서 그런 것 같다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우메다와 신사이바시를 지나니까 전철 안이 한산해졌다. 그제야 좀 여유 있는 전철 안에서 한 정거장이지만 잠시 자리에 앉기도 했다.
나는 그다음 정류장인 난바에서 내리는데 여전히 배는 꾸륵 거리고 지하철 안내 방송은 들리지 않았다. 구글 맵이 있었기에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다는 것만 확실하게 알았지 멍 때리고 있으면 지나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무튼 신사이바시에서 난바로 향하면서 이야 다음에 내리겠네 라는 생각만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뇌리에 딱 꽂히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우리나라도 지하철 타면 다음 도착할 역 주변에 유명 회사 이름이나 대학교명, 주요 건물 이름을 들려주지 않나. 일본도 그랬다. 이때 내 귀에 들린 한마디 ‘IVF 난바 클리닉’. 다른 거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IVF라는 말은 정확하게 들렸다. (IVF는 in vitro fertilization의 약자로 체외수정, 즉 시험관이라는 뜻이다) 시험관 생각을 안 하려고 여행을 왔는데 이게 뭔 일? 이번 여행 최대 미션은 내 머릿속에서 시험관을 지우는 일이었다. 아마 시험관을 안 하고 있었으면 그렇게 정확하게 내 귀를 강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기 그런 곳이 있겠거니 생각해고 말았을 일인데 내가 그것에 사활을 걸고 있다 보니 과장스러울 정도로 명확하게 들렸다.
즉시 검색해 보았고 실제로 IVF 난바 클리닉이라는 병원이 있는 것도 알아냈다. 오사카에서 상당히 규모가 있는 난임 병원이라고 한다. 덕분에 일정 외에 수립한 마인드적인 계획은 틀어졌지만 한 번쯤 피식 웃을 수 있기도 했다. 역시 어쩔 수 없구나…
내린 직후는 화장실이 급하지 않았다. 띄엄띄엄 부정기적으로 꾸륵거리는 배는 화장실을 찾기 최적인 장소에서는 눈치 없게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왜 이러는 거니 나 여행 중이란 말이다. 또 어디 가서 화장실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 날 계획은 조식 포함 다섯 끼를 먹어보는 거였다. 물론 한 군데서 많이 먹지는 않는다. 조금씩 가장 소량만 주문해서 여러 군데서 다양하게 먹고 숙소로 돌아오자. 오사카에 왔으니 미식 투어 해보자가 구체적인 계획인데 초반부터 틀어지게 생겼다. 조식 다음 두 번째로 먹을 음식은 일본 라멘인데 라멘집에 가까워 오는데도 조식 소화 불량으로 요동치는 배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구글맵에 또다시 의존하여 그 아침에 감사하게도 여행객들을 위해 24시간 운영해 주는 이치란 별관을 찾았지만 수시로 골골 거리는 대장은 간격이 짧아졌을 뿐 잠재워질 생각은 하지 않는 듯했다. 일단 음식 표를 사자. 글로벌하게 유명한 음식점이어서 붐비지 않는 이른 아침에 찾아왔는데 장 상태가 따라주질 않네. 한글을 착실하게 지원해 주는 친절한 키오스크 덕분에 메뉴 고르고 돈 지불하는 건 메트로 티켓 사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냥 Best라고 쓰여있는 것만 손가락으로 터치하고 돈 넣으면 끝이었다. 거스름돈도 알아서 나와주니 참 쉽지용.
음식값을 선불로 내고 음식표 받는 것까지는 기다릴 일이 없었는데 그 후부터 대기가 있었다. 동양인뿐만 아니라 서양인도 많이 보였다. 잘 모르는 언어부터 영어도 많이 들리는 것 보니 세계적인 맛집인가 보다. 하지만 맛집이건 뭐건 조금 후 그 맛이 내 입 속으로 들어오건 뭐건 간에 간헐적이던 대장 요동치는 소리는 이제 한 번 통증을 쥐어짜기 시작하면 제법 오래 지속됐다. 직행했다. 화장실로. 이치란 별관 화장실은 한 칸이지만 다행히 사람은 없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무엇에 감사한지는 잘 알지 못하겠다. 다만 라멘을 먹기 전 속을 비울 수 있었다는 건 신사와 법당이 많은 일본 땅에 왔기에 받을 수 있는 은총이 아니었나 쓸모없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