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가야 한다니

[시간 순번 1] 난임 병원 처음 방문

by 실버반지

서랍 속 눈을 두지 않았던 한쪽 구석에 날 바라봐 달라는 듯 작은 수첩이 놓여있다.


먼지 쌓인 책장 맨 마지막 칸에도 누가 봐도 특별해 보이지 않게 꽂아 놓은 일기장 어느 페이지에도. 클릭 몇 번으로 간단하게 찾을 수 있어 더 이상 열지 않는 책으로 된 영어사전처럼 빼곡히 적혀 있는 글들. 삼십 대라는 나이에 그렇게 적어두었다.


해와 달이 날마다 자리를 바꾸듯 쉽게 되는 줄 알았다. 모든 게 자연스럽게 되겠지. 엄마가 되면 써놓은 글들을 보고 아이잘 키워야겠다 생각했다.

‘성과’ ‘퍼포먼스’ ‘실적’이라는 말 이면에는 항상 ‘빨리(fast)‘가 자리를 가득 차지하고 있다. 물 밀듯 밀려온 병사들이 상대 편을 휩쓸어버리는 춘추전국시대 영화 한 장면처럼 ‘엄마가 되었을 때’를 예상하며 적은 기록들은 바쁜 일상에 밀려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커피 한 잔을 살 때도 ‘fast’를 추구하는 시대에 일 외적으로 독립, 배우자, 아이, 가정을 만들어 간다는 것. 이루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쉽지 않게, 아니 어렵게 배우자를 만났다. 그리고 빼곡히 적은 종이들을 다시 꺼내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종이에 쓰여있는 일을 실현할 일은 빨리 오지 않았다.

아이를 갖는 건 빨리빨리 일하는 것과 다르다. 빨리 오라고 온 마음을 다해도 아직 남편과 나에게 반씩 존재하는 아이는 마음을 듣지도 알지도 못한다.

인간이 만드는 ‘빨리’라는 것은 할 수 있고 없는 영역이 존재하나보다.


사십 대 나이에 만난 나와 남편은 늦어진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아이를 원하는 마음이 컸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일찍 결혼한 후배가 ”우리는 애 안 낳기로 했고 어른들께도 다 말씀드렸어요. “라고 말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래 너희는 그럴 수 있지. 경제적인 이유라면 시간이 지나 경제력이 나아지면 생각이 바뀔 것이고, 말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너희들 사정이다.

그런 생각도 마음껏 할 수 있는 나이가 부러울 뿐이다.


어른에게 말하고 가족과 상의하고 할 시간조차 없는 나는 43세, 남편은 50세 때 일이다. 우리는 병원에 가자고 결정했다.

서로 동의하는 의사를 알아채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난임 병원 처음 방문한 날 남편과 나는 각자 이런 말을 들었다.

“나이가 있으셔서 시험관 빨리 하셔야겠네요.”

“실버반지님 자연임신할 가능성 별로 없어요.”

남편은 비뇨기과에서 나는 산부인과에서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의사에게 같은 의미 말을 듣게 됐다.

공부한 만큼 나온 성적표 바라보는 학생처럼 아무 느낌 없고 덤덤했다.


병원을 나와서 바라본 하늘은 덤덤한 마음만큼이나 무심해 보였다. 해가 우세하지도 구름이 우세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날씨.

이와는 다르게 병원 가기 전 날 내 마음은 구름이 우세했다. 난임 병원을 가야 한다.

마음만 먹으면 애가 생길 줄 알았던 자부심은 나이를 이기지 못했다. 그 생각에 무척 우울했다.


좋은 엄마가 되겠다며 책을 보며 아이 잘 키우는 방법을 열심히 적어놓던 삼십 대 때 한 친구가 말했다.

“얘는 그런 거 뭐 하러 써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친구 말에도 굴하지 않고 책을 읽고 또 쓰곤 했다.

그 친구가 먼저 결혼을 했고 애를 낳았을 때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그때 읽었던 책 제목 전부다 나도 알려줘.”


건강한 아이를 낳고 잘 키우겠다는 다짐은 세상 어떤 부모도 할 것이다. 그 생각이 드는 시점이 다를 뿐이다.

나는 좀 더 일찍 생각했고, 친구는 상황이 닥쳐서 생각했다.

그렇지만 흘러가는 시간으로는 친구가 실현한 시점이 더 빠르다.

나는 ‘딩크족’도 아니고 아이를 늦게 가질 생각도 아니었던 평범한 대한민국 X세대 여자다.

먼 길 돌아도 반드시 만나는 인연처럼 나와 아이도 끈끈한 끈으로 묶여 꼭 만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조용하게 우리는 치료를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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