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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커플, 그 우울함에 관하여

그녀의 21세

by 실버반지

꽃 피고 햇살이 따사로워지는 3월 아직 과대표도 뽑지 않은 학기 초반 어느 날


어울려 놀기 좋아하는 이들이 개강 파티를 제안했다. 이런.. 나는 놀 줄 모르는데. 저런 걸 제안하는 애들은 완전히 나와 반대 성향일 것이다.


그래도 가고 싶었다.

술을 마셔 본 적도 없고, 호프집이라는 곳에는 가본 적도 없고, 다수의 인원이 함께 앉아 있는 공간이 어색했다.

그런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학교 다니는 것 외 경험이 전무한 나였다.


그래도 해보고 싶은 호기심은 있는지 그런 자리가 마련되는 게 싫지 않았다.

술자리라는 건 어떤 곳일까.

가보기로 결심했다.


딱딱한 쿠션에 싸구려 천으로 둘러진 소파가 홀 전체에 직각으로 구부러져 놓여 있다. 마주 보는 곳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소파가 놓여 있다.


소파 사이에 기다란 나무 테이블이 있고 나는 딱딱하고 싸디 싼 소파의 구부러진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30명은 족히 들어올 공간임에도 과 애들이 전부 참석하니 예비 의자를 갖다 놓고 앉을 정도로 북적였다.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키가 170센티미터 정도에 검정 천 가방을 크로스로 맨 뿔테 안경을 쓴 마르고 골격이 작은 남자가 내 옆에 앉았다.


그는 내게 자기 이름을 말하며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나는 반갑다고 말했고 그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리가 시작되자 3,000cc 맥주 대여섯 피쳐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병 수의 소주가 놓였다. 모두 잔을 채우라고 이 자리를 제안한 아이가 말했다.


참석자들 모두 맥주잔에 술을 따랐고 다 같이 한 잔 원샷 하며 '술자리'라는 것이 시작됐다.


이제껏 술을 먹어본 적이 없어 얼마만큼 마시면 취하고 취했을 때 발휘하는 술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 경험한 적이 없었다.


맥주 한 모금에도 머리가 핑 도는데, 아까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붙어 앉은 뿔테 남자애는 내가 맥주잔 내려놓기가 무섭게 옆에 놓인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자기랑 건배하고 마시자고 했다.


같은 과 애라는 안도감에 또 술자리에 참석해 본 적이 없으니 거절하는 방법을 모르기에 소주 한 잔을 그대로 마셨다. 그리고부터 집에 와서 자고 일어날 때까지 줄줄이 비엔나가 간신히 붙어 있는 것처럼 뜨문뜨문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소주 한 잔에 맛이 가버렸다.


다음 날 뿔테 남자애는 첫 수업 시작하기 전 우리 집 앞에 와있었다. 학교에 바래다주겠다는 것이다.


간간이 떠오른 기억에 의하면 이랬다.


걔는 나를 데리고 호프집 밖으로 나갔다.

자리가 활성화되자 안에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망각과 현생을 오가는 부실한 어젯밤 일을 조금 더 더듬어 보았다.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무리 중 몇몇이 입가에 재미있어 죽겠다는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봤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뿔테 남자애의 전화를 받고 같이 학교에 도착하자 영문도 모르게 나는 캠퍼스 커플이 되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걔는 나를 여자친구라는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몇몇은 내 얼굴을 보고 킥킥 버리며 웃기도 했다.

아무리 되새겨보려고 해도 소주 한 잔에 버무려진 대뇌 기억 중추는 왜들 그러고 웃는지 답을 내주지 않았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아주 초반에. 누가 누군지 이름도 다 못 익혔을 시점에 나는 엉겁결에 CC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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