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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Aug 11. 2017

19

짜장라면

  순간이 좋던 나쁘던, 시간은 흐른다.

내가 협재에서 홀로 자전거를 타고 서귀포로 들어온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에 도착한 게스트하우스는 마치 어느 이온음료 광고에 나올법한 하얀 벽면에 하늘색 지붕을 가진 작은 곳이었다. 적은 인원을 수용하는 게스트하우스여서 조용하고 아기자기한면이 있었다. 도착한 당일 저녁, 나는 수첩을 들고 1층 카페로 내려갔다. 카페의 벽면이며 바닥은 원목으로 되어있었고 불빛은 오렌지색이었다. 실내는 서늘한 감이 있었지만 오렌지색 불빛 덕분에 나름의 따뜻함이 물씬 느껴졌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얹혀있는 테이블 앞에 앉아 나는 수첩을 펼쳤다. 내일 여행지를 휴대폰으로 찾아보면서 정리하는 내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방으로 안내해줬던 여자 스탭이 들어왔고 나를 발견한 그녀는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춥지는 않아요?”

그녀는 전기포트에 물을 올려두고 벽장에서 코코아가루를 꺼내었다.

 조금 서늘한 정도에요.

 “전기난로 있는데, 켜드릴게요. 코코아 드실래요?”

 네, 고마워요.

작은 체구의 그녀는 코코아가루를 세 개의 컵에 많다, 싶을 정도로 듬뿍 나눠담았다. 금 새 끓어오르는 포트의 뜨거운 물이 부어지고 가루를 녹이며 컵의 벽면을 두드리는 티스푼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테이블의 앞에 마주앉으며 건네는 컵을 고맙습니다, 하며 나는 받아 들었다. 나는 차가워졌던 두 손을 녹이며 입으로는 코코아를 후- 후- 불어 식혔다.

 “계획 세우고 계셨나 봐요.”

그녀는 내 수첩에 시선을 두었다가 나를 보며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입 안엔 달디 단 코코아가 잔뜩 들어있는 상태였기에 고개를 먼저 끄덕였다.

 내일은 성산까지 가야하는데, 중간에 갈만한 곳 찾아보는 중이었어요.

 “쇠소깍 볼만해요.”

 네, 둘러볼까 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코코아를 한 모금 더했다. 그리고 나서 잠시 나와 그녀 사이에 어색한 공기의 흐름을 깬 것은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다.

 “어, 이거 내거지?”

그의 크고 높은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해맑은 표정으로 코코아가 든 컵을 들고 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일찍 좀 들어오지. 사장님 알면 또 혼나.”

꽤 들뜬 표정의 남자는 그녀와 내 쪽으로 다가왔고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걷어내는 시늉을 했지만 그의 행동이 나쁘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아니, 우도에서 못 나올 뻔 했다니까.”

그는 이마에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우도까지 갔었어?”

 “시계도 없었는데 휴대폰까지 죽어서 하마터면 막배 놓칠 뻔 했어.”

 “보조배터리 안 챙겨가더니.”

여자는 남자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도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어디 다녀오셨어요?”

그러다가 그는 여자의 눈초리를 피하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내게 말을 건넸다.

 중문이요.

 “혼자?”

내 대답에 두 사람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서귀포 중문에는 다양하게 체험할 것들이 많았지만 혼자서 가기보다는 적어도 같이 혼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서로 사진이라도 찍어주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심지어 우울하기까지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었다.

 하하, 네. 혼자 가니깐 마땅히 할 게 없더라구요.

나의 대답에 세 사람은 조금 어색해지려했지만 이내 나를 향하고 있던 그들의  안타까움에 어린 눈빛을 거두었다. 남자는 코코아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차차, 나 저녁 안 먹었어.”

 “라면?”

남자는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그녀를 향해 박수 쳤다. 나는 티격태격하다가도 서로를 배려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불현 듯 협재 게스트하우스의 사장님과 주혁씨 생각이 났다. 그리고, 해진씨도. 그들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캡사이신 조금 넣을게요.”

협재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세 사람을 생각하는 그 찰나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벌써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은하가 짜장 라면 진짜 맛있게 잘 끓여요. 너가 끓이는거 먹으려고 내가 저녁을 안 먹고 왔잖아.”

 “시끄러, 김재준. 그냥 귀찮았던거 다 알어.”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 곧 이어 맵고 달큰한 향이 온 실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은하씨의 바쁜 손과는 다르게 재준씨는 느긋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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