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내다.
사장님은 내가 뜸을 들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드디어 무슨 말을 하려나 보다 싶어 빵을 씹으면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귀로 들은 다음 대사가 참으로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사장님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순간적으로 더 크게 뜨며 놀라는 듯했지만 다시 빠르게 표정을 바꾸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를 냈다
“네, 그랬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에 사라질 즈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시간은 내가 그 속에서 무얼 잡고 살아가는지에 따라서 나를 반짝이게 할 수도 있고, 때론 구리게 만들 수도 있죠. 저도 공감해요. 하지만 저는 8살 때부터 그런 운명을 잡아서 저의 10대는 꽤 반짝거릴 수도 없었어요. 조금 반짝이려다가도 눈치를 보고 빛을 감추곤 했죠.
사장님은 내가 말을 하는 동안 식탁 위로 손을 올려 의자를 당겨 바로 앉았다.
엄마는 처음에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부당하다 생각하셨을 거예요. 아마 도망가고 싶기도 하셨을 거예요, 남겨진 아이들이 그렇게 많았어도요. 하지만 엄만 그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셨어요. 뭐든 닥치는 대로 하셨던 거 같아요. 어쨌든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했고, 교육을 시켜야 했고, 그 아이들이 기죽지 않게, 당당하게 키우고 싶으셨을 테니까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시작으로 나는 내 속에서 무언가가 끌어 올라오듯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하게 그녀에게 내 말을 전달했다.
엄마가 저를, 우리를 먹여 살리려 아등바등하며 살아내시는 동안, 저는 학교에서 믿었던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배신을 당했어요. 그런 생활을 감추다 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깊고 어두운 수렁 속으로 자꾸만 빠지게 만들고 있었더라고요. 자꾸만 숨었고, 사람들을 피했고요. 사춘기 소녀로서 당연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땐 정말 사람이 무서웠어요. 동갑내기 아이들이 두려웠어요. 그렇게 10대를 보냈어요. 무언가를,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채로. 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마음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죠. 그땐 시간을,...
사장님은 천천히 눈을 감고 뜨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분하게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잡고 싶지만은 않더라구요. 그냥 강물도 아니고 수돗물이 흘러가듯이 콸콸, 콸콸콸 얼른, 흘러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요.
나는 쏟아내듯이 뱉어내던 말을 잠시 멈추고 희미하게 미소를 잠시 지어 보였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나는 시선을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얹었다. 오렌지 불빛이 담겨있는 물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 얹어진 내 손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마치 내가 풀어내야 할 말이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듯 사장님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20살이 되었는데 달라진 건 없는 거예요. 물론, 대학을 갔기에 환경은 달라졌지만 정작 나 자신은 변한 게 없었어요. 여전히 똑같았고 지금도 역시나 그래요. 이렇게 제 시간 속에서 제가 잡은 것들은, 제가 잡고 있는 것들은 여전히 구려요. 사장님께서 처음 절 만났을 때 왜 하필 제주도냐고 하셨잖아요? 이게, 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잡고 있는 그 시간을, 그걸, 바꾸고 싶었어요, 여기서요.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저.
식탁 위, 와인잔에 담긴 오렌지빛 물은 여전히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말이 마치자마자 내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지만 나는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사장님은 여전히 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갑자기 너무 쏟아버린 것 같아, 죄송해요.
"아니야, 되려 고마워요, 진솔한 말을 해줘서요.”
그녀는 내 마지막 말이 끝났을 그제야 따뜻한 미소를 띠고 눈빛을 반짝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내게 말하려는 듯했지만 고개를 미세하게 절레절레 흔들어서 내게 할 모든 물음을 털어내는 듯 보였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걱정이 불현듯 들었지만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다 되어갔다. 마음은 조금씩 급해지고 있었다. 나는 접시에 남아 있던 음식을 급히 먹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제주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창 밖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하늘에는 희뿌연 주홍 빛의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사장님과 함께 게스트하우스 건물에서 빠져 나와 내가 가져온 자전거 근처까지 걸어오셨다.자전거 뒤쪽 안장에 가방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바퀴 기압이며 체인을 살펴보았다. 사장님은 아무 말 없이 곁에 서서 오래도록 나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 마침내 자전거에 앉아 출발하려는 내게 사장님은 내가 인사를 건네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조심히 여행 잘 다니고,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저랑 주혁이는 항상 여기 있으니까, 꼭 다시 와요.”
고맙습니다. 또 올게요.
“그리고 윤겸씨.”
그녀는 조금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가지고 있었던 그런 기억은 여기 다 버렸다 생각하고 이제 반짝이는 시간 속에 살아가요. 윤겸씨가 너무 아까워..”
그리고 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그 곳을 빠져 나왔다. 이제 과거의 시간, 과거의 사람이 될 그들을 뒤로 한 채로 나는 새로운 시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러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