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착

2017.08.18

by 한서



해발 4000m의 엘 알토 공항은 저지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협을 주는 장소인지 모른다. 약 4000미터라는 고도는 대한민국 서울 38m 고도의 100배 이상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몸에 무리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가 문제였다. 8월의 한국은 여름이라면 8월의 남미는 한 겨울이기 때문에 특히나 비행기 안에서 반팔 차림으로 있었던 나는 오들오들 떨면서 많은 사람들과 입국 수속장으로 걸어갔다. 걸칠 두꺼운 겉옷을 좀 빼놓을 걸... 얼마나 후회가 되던지!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입국장에서 덜덜 떨면서 여권에 도장을 받고 짐을 찾는 것까지 꽤 빨리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짐을 찾고 나서 나는 당장 두꺼운 후드 집업을 가방에서 꺼내어 입었다. 짐을 찾은 동기들과 함께 다른 동기의 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캐러셀(carrousel)이 몇 번을 돌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동기 3명이 짐을 다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사이좋게도 한 사람당 하나씩, 모두 3개의 수화물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짐을 찾기 못한 동기들은 멘붕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중 한 동기는 어떻게 볼리비아는 도착한 순간부터 격하게 우리를 반기느냐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사무소에서 우리를 마중 나오신 선생님께서 우리 팀의 짐 3개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항공사 측에 알렸고 안전하게 도착하기만 바라면서 공항에서 빠져나왔다.

우리는 현지인 직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소포카치에 위치해 있는 홈스테이 집에 짐을 둔 다음에 코리아타운 이라는 한국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사실 30시간 동안 국적기에서 먹은 기내식 빼고 외항사 기내식은 한국인인 내 입맛에 절대로 맞지 않은 음식들이었다. 특히나 미국에서 페루로 가는 비행기에서 먹은 기내식인 치즈 라비올리는 금방이라도 토를 할 정도로 속이 느글거려 얼른 고추장을 한 숟가락 듬뿍 퍼먹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볼리비아에 오자마자 한식이라니, 정말 감지덕지였다. 게다가 쌀밥을 먹으니 왜 그런진 몰라도 아팠던 머리도 덜 아픈 느낌이 들었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인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옆에 앉아있던 동기가 갑자기 얼굴이 하얘지더니 구토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아예 고개를 숙이고 힘들어하는 것이 아닌가. 밥을 먹다 말다 하더니 그 아이는 결국 어지럽다며 식사를 다 마치지 못했다. 점심을 서둘러 먹은 후에 우리는 앞으로 두 달간 묵을 홈스테이 집으로 돌아갔다.

대문 앞엔 홈스테이 집주인 아주머니인 글로리아와 아저씨 르네가 서계셨다. 그들은 동양인 여자 아이 3명을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나는 그들에게 어눌한 스페인어로 "안녕하세요, 세뇨라 글로리아, 세뇨르 르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글로리아는 "세뇨라, 세뇨르 대신에 마마, 파파라고 부르면 돼."라고 하셨다. 하긴 같은 집에 살고 볼리비아에 가족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으니깐 아줌마, 아저씨라고 하는 것보다는 엄마, 아빠라는 호칭이 그들이 듣기에도 더 좋고 함께 지낼 때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글로리아는 인사를 나눈 대문 앞에서 우리에게 종이 네 장을 하나씩 뽑으라고 하셨다. 바로 앞으로 묵을 방을 정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4번을 뽑았다. 4번 방은 네 개의 방 중에서 가장 넓은 방이었다. 넓다고 좋아라 했는데 작은 책상과 침대, 화장대가 방의 가장자리에 놓여있어서 중앙은 조금 휑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게다가 이 방은 서늘하기까지 한 게 아닌가.

아, 설마...

나는 대학 때 혼자 자취를 할 때도 그랬지만 내 집과 내 방을 선택할 땐 항상 햇살이 들어오는 곳인지 아닌지를 제 1순위로 생각해왔다. 그렇게 내 삶에 햇살은 항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왠지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방엔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냐, 그래도 타국에 몸을 뉘고 밥 먹을 곳이 있다는 게 어디냐. 밤 낮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나는 방에 짐을 옮기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잠시 쉰다는 게 그만,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 날은 정말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피로해서 씻지도 못하고 다음 날 아침까지 거의 12시간을 넘게 잠만 잤더랬다. 다음 날, 눈을 뜨니 몸 위엔 두꺼운 이불이 덮여 있었다. 잠시 상황 파악을 한 다음 왼쪽으로 몸을 돌리자 램프 옆엔 머그컵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날 저녁, 잠결이었지만 분명히 글로리아가 내 방에 들어와서 이불을 덮어주고 고산병에 좋은 코카 차(té de coca)를 끓여서 가지고 들어와 나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불을 끄고 나간 것이 기억났다. 나는 몸을 일으켜 남아있던 코카 차를 원샷했다. 해가 떠있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방 안으론 햇살이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우울감에 빠지지 않게 매일 매일 햇빛을 많이 받고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에 걱정도 되었지만 설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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