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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an 14. 2019

첫 번째 투어. #쿠스코대성당, #코리칸차

2018년 12월 16일 <Day 2>


 대성당 앞에서. 1:15 PM

 Discover beautiful Cusco City  


머플러를 팔고 있던 친구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그녀가 나를 놓아준 후 나는 바로 대성당 앞으로 걸어갔다. 오늘 유심칩을 사지 못했기 때문에 길에서는 연락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전에 스타벅스에 앉아 있었을 때에 AirBnB 투어의 호스트인 Rorald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래서 대성당 앞에서 1시에 만나자는 연락을 미리 했었는데 마지막엔 '저는 키가 큰 아시아인이고, 분홍색 점퍼와 안경을 쓰고 있어요. 저를 발견하시면 불러주세요!'라는 나를 묘사한 글을 적어 보냈다. 대성당 앞에 1시 5분 즈음 도착한 나는 전혀 모르는 Rorald라는 사람이 나를 알아봐 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시 15분 즈음, 멀리서 큰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내쪽으로 달려오는 달마시안 한 마리가 보였다. 나는 워낙에 개를 좋아하니까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강아지 주인이 Rorald였던 것이다. 창이 넓은, 검은색 중절모를 쓴 그는 처음엔 내게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의 인사에 스페인어로 받아치자 '아, 맞다. 너 스페인어 하지!'라고 했다.

 "네, 조금이요."

그는 본인의 아내와 반려견을 내게 소개해주었고 함께 대성당의 옆 쪽으로 걸어갔다.

 "이 투어는 우선 대성당 안을 들어가서 둘러보고 이후에 코리칸차로 걸어갈 거야. 그러고 나서 삭사이와만이라는 잉카 유적지에 차를 타고 갔다가 둘러본 후에 다시 시내로 돌아올 거야."

대성당의 옆으로 걸어가자 많은 여행객들과 투어사 가이드들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 후 옆에 있던 가이드들 중 한 여성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처음엔 그가 가이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가이드는 따로 있고 그는 중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 이런 시스템이었구나.'

 "아직 같이 다닐 사람들이 다 도착하지 않아서 조금 기다리려고 해. 대성당에 들어갈 테니까 미리 표를 구입해 오는 건 어때?"

그는 투어비에는 티켓값이 포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성당 입장 티켓도 코리칸차 입장료도 삭사이와만 패키지 티켓도 따로 구입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현지 여행사에서 신청을 하는 것 보다도 더 비싼 값에 투어를 신청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객들을 기다리면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차이였다. 그와의 대화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볼리비아에 있는 중국집, 이른바 Chifa라는 이름은 페루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라는 것이었다. 페루에 중국인들이 정착하면서 Chifa를 처음 차렸고 그 이후로 널리 퍼져나갔다, 라는 말을 했다. 이것 또한 믿거나 말거나한것이지만 말이다. 한참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동행들이 다 모여 있었고 나는 가이드에게 넘겨졌다.

 "그럼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 안녕!"

그들과 그들의 반려견인 Mancha(점박이라는 뜻)와 헤어지고 나는 동행들과 함께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대성당 내부에서. 1:30 PM


왼쪽에 보이는 성당이 Basílica Catedral del Cusco,

 대성당 내부는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카메라에 담지 못했으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남미의 성당답게 내부 인테리어의 대부분은 도금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 성당은 1560년부터 1664년까지 약 100년의 시간 동안 잉카인들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졌다고 한다. 종교를 앞세워 잉카문명을 파괴하고 식민지화 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성당이었기에 잉카인들의 피와 눈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규모가 크고 너무나도 완성도가 높은, 슬프게 아름다운 성당을 지은 잉카인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은 성당 내부에는 여러 개의 거울이 사방으로 붙어 있고 그 거울이 바닥의 중앙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함께 투어를 하고 있던 한 여성이 그 거울들을 보고 가이드에게 질문을 했다. 그녀의 질문에 가이드는 거울은 당시 건축양식 중 하나이며 이렇게 거울을 붙여 놓음으로써 낮에는 햇빛으로, 밤에는 달빛으로 건물 내부를 밝힐 수 있었다는 대답을 했다.

대성당 내부엔 종교와 관련된 다양한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시간이 많이 없기 때문에 일일이 다 설명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가이드는 수많은 그림들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그림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이 곳 사람들이 성당을 지을 때, 특히 성서와 관련된 그림을 그릴 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것들은 현지에서 볼 수 있는 것들로 바꿔 그려 넣었다고 한다. 기억에 많이 남는 그림은 '최후의 만찬' 중앙에 그들의 전통음식인 'Cuy(기니피그 요리)'가 그려진 것이었다. 그런데, 뭔가 장난스럽게 그려 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었을까.


 코리칸차에서. 2:30 PM

 대성당 내부를 구경한 후에 코리칸차로 걸어갔다.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가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그 위에 지어진 산토도밍고 수도원 내부.

코리칸차가 지어지기 시작한 확실한 연도는 모르지만 1438년도부터 Pachacuteq가 새롭게 권력을 잡으면서 재건축이 되었고 이후 현재 불리고 있는 이름인 Qorikancha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건축물의 용도는 그들의 신, 태양(inti) 신을 모시기 위한 것이었기에 코리칸차는 Intikancha(인티칸차)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사실 잉카인들은 이 신전을 태양신을 모시는 종교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쿠스코의 정치와 지리학적으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신전을 '금으로 된 층'이라고 묘사하는데 건물의 바닥과 벽이 금으로 되어있었으며 정원에는 금으로 도금이 되어있던 샘에서 물이 솟아오르고 동물들과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잉카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건물이었던 이 코리칸차는 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의 침략으로 인해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코리칸차를 이루고 있던 금은 모두 녹여 스페인 본국으로 옮겨갔고 잉카인들의 건축술로 정교하게 이뤄져 있던 신전은 무참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토대만 남겨진 신전의 위에 그들의 '산토 도밍고 성당 및 수녀원'을 건축했다. 이렇게 산토 도밍고 성당은 스페인의 건축 디자인과 잉카인들의 건축물과의 합작(?)된 건축물로서 스페인 식민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하나이다. 놀라운 점은 이 잉카인들의 걸작인 코리칸차는 과거 1650년, 1749년 그리고 1950년에 있었던 세 번의 대지진이 쿠스코를 덮쳤을 때도 다른 스페인 사람들이 건축한 성당과는 다르게 커다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잉카인들의 건축술은 참으로도 대단했구나, 라는 생각은 했지만 건물 안을 둘러보면서 이 건물이 ‘ 아름답다.’라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푸른 하늘 아래, 하얀 벽과 주황색 지붕을 가진 전형적인 스페인식 건축양식이 회색의 돌들을 밟고 그 위에 서있는 모습이, 짓밟힌 문명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기분이 씁쓸하고 슬프기까지 했다.

사실 코리칸차에 대한 이런 이야기와 식민시대 이야기를 듣자니 우리나라의 일제시대가 떠올랐다. 타국에서 내 나라의 역사를 떠올린다는 그들과 우리의 역사의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당시 강대국들의 땅따먹기는 꼭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왜?’라는 의문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다른 나라를 약탈하면서까지 본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이었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어쩜 그렇게도 잔인할 수가 있나…

그러나 사실 21세기도 다를 건 없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경제적, 군사적인 권력을 가지고 쥐락펴락하고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지배하길 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힘이 있는 자들, 돈이 있는 자들이 강한 자가 된다. 이게 우리 삶 속에선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아마 우린, 죽을 때까지 이런 당연한 순리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런 삶을 살겠지.

 코리칸차는 둘러본 후 투어 일행은 코리칸차의 옆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가이드는 어느 지점에 여행객들을 왼쪽 벽으로 세워두고 코리칸차의 벽을 보면서 잉카인들의 건축방식과 스페인인들의 건축방식을 비교해보도록 했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잉카인들은 돌을 참으로 잘 다루는 민족이었다.

 “종이 한 장도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완벽하게 돌을 쌓아 담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이 쌓은 담을 보면 잉카인들을 따라 하려고 노력해도 돌과 돌 사이에 접착물질을 섞어 바르고 그 위에 돌을 올리는 방식으로 건축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타벅스를 마주칠 수 있는 이 거리의 사진이야말로 왼쪽의 잉카인들에 의해 쌓인 담과 오른쪽의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벽을 비교하기 충분하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내려간 후 대로에서 여행사 버스를 올라 투어의 다음 코스인 Sacsayhuaman(삭사이와만)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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