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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Aug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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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8시가 조금 넘어서 식사와 설거지를 다 마쳤다. 사장님과 남동생은 부엌에 들어가 여태껏 나오지 않아 나와 박해진씨만 남겨지자 다시 어색함이 둘 사이에 흘렀다. 그런데 그가 먼저 제주도에 도착한 첫 날부터 한라산 등반을 했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나는 장단을 맞추며 한라산과 그 주변 관광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는 아까보단 좀 더 친근하게 내게 말을 건넸다. 나 또한 그의 말에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있었다. 그리고 몇 분 후에 부엌으로 들어갔던 두 사람은 아까 마련해둔 문어 숙회와 술을 가지고 식당으로 다시 나왔다.

 “짜잔!”

 “윤겸씨 덕에 이런 것도 먹어 보네요.”

박해진씨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으론 ‘맛있겠다.’라고 모양을 냈다. 천진하게 보이는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사장님은 소주를 작은 잔에 따랐다. 투명한 잔을 맑은 술이 채웠고 식당의 오렌지 빛 조명이 그 위에 앉아 반짝였다. 나는 술이 잔에 따라지기 전부터 잘 마시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그런 나를 배려해 술잔의 절반만을 채워 주었다.

 고맙습니다.

밖은 벌써 어둠에 묻혀 있었지만 유일하게 켜져있던 가로등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를 비추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 짧은 시간에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이미 술 잔을 비워냈다.

 “에이, 윤겸씨. 홀짝, 홀짝이야?”

 제가 정말 술을 잘 못해요.

남동생분의 타박에 난처함과 미안해 어쩔줄을 몰라하니

 “조금씩 마셔요.”

박해진씨는 눈썹을 둥글게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이구, 신주혁.”

사장님은 신주혁씨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때리고는 비어있는 잔을 채웠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도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고 박해진씨의 잔 역시 채웠다. 네 사람의 술 잔이 부딪혔다.

 그런데 사장님께선 언제부터 제주에 계신거에요?

나는 테이블 너머에 있는 여 사장에게 말을 던졌지만 정작 받을 사람의 대답은 내게 오지 않았다. 다만 잠시 조용해진 테이블 위로 사장님이 아닌 신주혁씨의 대답이 둥둥 떠다녔다.

 “음, 8년 정도 됐나?”

 아,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인 후 미소 지으며 술잔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잔에 조금 남아있던 술을 홀짝 마셨다. 아, 내가 뭔가 실수를 한걸까. 나는 사장님의 잔에 술을 채웠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맞아요. 벌써 8년이나 됐네.”

 “으휴.”

사장님은 잔에 가득 따라진 술을 단숨에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회사 다닐 적에 일 때문에 제주도에 잠시 왔었어요, 9년 전에.”

이름만 대도 알만한 회사를 다니던 사장님은 일에 치여 살던 삶에서 벗어나고 싶던 중 제주로 출장을 온 사장님은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처럼 추운 겨울이었고 역시나 제주엔 일 때문에 왔으니 여유가 없었죠. 처음 그 사람을 만난건 호텔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 때였어요. 사실 저는 그 날 일찍 호텔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는데, 그 미팅이 취소되는 바람에 그 날 하루 스케쥴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였어요. 그래서 혼자 카페에 앉아 개인 업무를 하고 있었죠. 정말, 만남이라는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나는 생각해요. 만약 그 때 미팅이 취소 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텐데 말이죠.”

그녀는 왼쪽에 놓여있는 컵의 물을 조금 들이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커피를 쏟았더라구요. 딱 봐도 꽤 드세보이는 여자의 흰색 원피스가 갈색 커피로 뒤덮혀 있었구요. 내가 봤을 때 그 사람은 스페인어로 미안하다고 하고 있었고, 여자는 말은 안 통하지 엄청 답답해하면서 짜증을 내고 있더라구요.”

 스페인어요?

 “네, 스페인어. 그 땐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여자와 주눅든 그 사람 옆으로 제가 걸어갔어요. 그리고 중재에 나섰죠. 그 때 제가 스페인어를 좀 배우고 있었거든요."

 “오지랖이 넓었던거지, 누나가."

 “남자는 저를 통해서 여자에게 보상 해주겠다고 얘기를 했고 여자는 그래도 여전히 짜증을 냈어요. 어쩐지 조금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일은 잘 처리 되었죠.”

여자가 투덜대며 카페를 나갈 때 까지 두 사람은 그녀의 뒷 모습만 계속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사장님이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를 올려다보자 그는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멍하게 서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정말 감사합니다.”

 네? 한국어로?

 “네, 정,말,감,사,합,니,다. 이 여섯 글자를 또박또박하게 내뱉는데, 진짜 너무 황당하고 웃겼다니깐요.”

그는 사장님보다 3살 아래였고 한국계 영국인이었다. 스페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당시엔 여행객이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한국어를 못 알아 듣는 척을 계속 했다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드센 여자였기에 놀랐고 게다가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는 걸 알고 나타나 어눌한 스페인어로 통역을 하는 사람과의 만남 또한 당황스러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인연이 닿았고 그 날 하루 사장님은 남자의 가이드가 되어주기로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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