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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Aug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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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2


 “사실 나도 제주도를 잘 몰랐어요. 그래서 며칠 머무르는 동안 내가 일 때문에 갔던 곳을 그 사람과 다시 들렀죠."

그녀는 단순히 일 때문에 다녔던 장소를 그와 함께 하루를 보내면서 다시 방문했고 마침내 그 장소가 얼마나 아름답고 재미있는 곳이었는지,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었다. 하루 동안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저녁이 되어서도 이야기는 끊임이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술을 찾게 되었다고.

 “말이 참 잘 통했어요. 어쩜 그렇게 끊임없었는지... 어쩌면 그 사람이 말솜씨가 뛰어났던거였는지도 모르죠, 꼬리에 또 꼬리가 물리고 물리고... 지금 생각해봐도 놀라워요. 아참, 그리고 그 가게 앞 야자나무 가로수길 위에서 키스도 했지."

그녀는 한참 동안 빈 허공을 바라보다가 뭔가 부끄러운 듯 양 볼을 감싸곤 후후 웃었다. 그리곤 물을 한 모금,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은 이미 반쯤 풀린 상태였으나 발음은 똑똑했다. 주혁씨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고 박해진씨는 두 손을 깍지 낀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꽤 술이 들어간 듯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 또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참 신기했단 말이죠. 분명 처음 봤는데, 그 날 처음 본 사람이었는데 전혀 처음이 아닌 듯한 기분... 그 사람의 향기, 목소리, 눈빛까지도 너무 친근하고 다정했어요. 어린 애들이 하는 말처럼, 그게 첫눈에 반했다? 그런거였을까요."

당시 그녀는 제주도에 머물 날이 3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들은 다음 날 저녁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 대해 물어보고 또 답변해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내가 먼저 오늘 들어가지 말자고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나는 그녀의 눈이 점점 붉어지는걸 볼 수 있었다.

 "저는 지쳐있었고 사람이, 사랑이 그리웠었나봐요. 외로웠는지도 모르죠.”

술기운으로 그녀의 눈이 충혈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생각에 눈이 충혈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잔에 또 한 번 술을 따랐다.

 “마침 짧은 휴가를 보내는 것 같았고 실로 그랬거든요.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은 그런 꿈 같았어요.”

투명한 액체가 가득 든 작은 잔을 그대로 들고 그녀는 술잔을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한 달 정도 제주에 있을거라고 하면서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더라구요. 뭐, 돌아와서는 그 사람과 연락을 가끔 할 수 있었어요. 일주일에 두 번이면 많았던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사람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더라구요. 저는 그 사람의 출국 날 그를 마지막으로 볼 수있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약속 하나만 하자고 했어요. 일년 뒤 다시 제주에서 우리가 처음 같이 간 바다에서 만나자고,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죠. 스페인으로 간 그 친구와는 연락이 이어졌지만 이내 끊어졌어요.

그녀는 긴 한숨을 내뱉고는 단숨에 술을 마셔버렸다.

 "그 날, 그 사람이 내게 '우리가 다시 볼 수있을까요?'라고 물었어요. 나는 그 물음에 그렇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알았죠, 그 말에 대한 정답을.” 
그녀는 텅빈 술잔을 빙 돌리다 멈췄다.
“정답은 아니요. 아니요, 였지. 난 그 때 틀린 답을 했어요. 그리곤 그게 맞는 답이라 우기는 바보가 되어 버린거야.”

그리곤 다시 술을 가득 담은 잔을 들고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그 바다가, 바로 여기인데...”

말 끝을 흐리며 창 밖을 바라본다.

 약속은 잊지 않으려 했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난 못 갔어요. 정신을 차려보니까 약속한 날에서 이틀이나 지난 뒤더라구요. 후후후”

쓸쓸하게 웃던 그녀는 그 독한 술을 안주도 없이 또 다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마치 마음 속에 담아뒀던 모든 것을 토해냈다가 다시 술과 함께 그를 마음에 담는 듯 했다. 그녀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숙여졌고 이내 테이블에 엎드려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나는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고 이내 그녀의 흐느낌이 귓가에 들려왔다.
 "...그 사람은 그 날...왔었을까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서 돌아온 신주혁씨는 사장님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박해진씨는 말없이 주혁씨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나는 남아있는 술을 남김없이 마셨고 잔을 놓자마자 박해진씨는 술을 조금 따라주었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머지 세 사람은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정적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잠시 후 신주혁씨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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