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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Oct 23. 2016

9

길 위에서



 2층에서 그와 헤어지기 전에 나는 그에게 한림공원까지 걸어 갈거라고 얘기했다. 그는 알겠다고 하며 30분 뒤 1층에서 보자고 했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찾아 꺼내들었다. 부재중 통화 5개가 와 있었고 그 중 3개는 엄마에게로부터였다. 나는 붉게 물들어있는 '엄마'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한참동안 신호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 지지배야, 무슨 일 일어난 줄 알았잖어."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건 엄마의 걱정어린 목소리였다.
 미안해. 먼저 전화하려고 했는데.

 “엄마한테 전화도 못 할정도로 그렇게 좋아?"
서운함이 섞인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콧소리를 냈다.
 미안해요. 게스트하우스 도착하자마자 씻고 정리하고... 별거 한 것도 없는데 정신이 없더라구. 어제는 진눈깨비가 왔는데 지금은 날씨가 너무 좋아. 확실히 변덕이 심하네. 근데 엄마, 제주도가 진짜 뭍보다 덜 추운거같아.
잘대며 떠드는 내 목소리에 휴대폰 너머로 엄마가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입가엔 분명 미소가 지어져있고 그녀의 눈은 반달 모양이 되어있으리라.
 “그래, 오늘은 어디에 갈거니?"
 한림공원 가려구.
 “여행 잘 하고, 사진 찍어서 엄마한테도 보내줘. 조심하고."
 알겠어요. 끊을게.
왠지 꽤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반가워 목소리가 높아지고 커진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서 괜히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엄마는, 내가 제주도에 갈거라는 말을 들은 날 이후부터 매일 걱정을 하셨다. 괜찮다고 괜찮을거라고 계속 이야기했음에도 그녀는 매일 걱정을 했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을 걱정하는건 당연하지만 단 한 번도 여행이라던지 다른 쪽으로 빠지는 일이 없었던 나였기에 엄마의 걱정은 더 컸으리라. 엄마에게 나는 어떤 딸일까. 언젠가부터 엄마는 내가 살아가는 모습에 무언지 모를 대리만족을 느끼는 듯 했다. 좋은 학점을 받아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때, 장학금을 받았을 때, 소개팅을 했을 때, 엄마와 무언가에 대하여, 특히 나의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무언가 상상을 해가며 내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볼때면 나는, 궁금했다. 어린시절 엄마는 어떤 딸이었을까, 하는.
나는 입고 있는 후드 위에 점퍼를 입고 작은 지갑과 휴대폰을 들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온 어제보다는 확실히 가벼운 몸으로 방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운동화가 점점 더 젖어 발이 차가워졌지만 햇볕이 강하기에 금방 마를거라 생각하며 1층 식당에 앉아 박해진씨를 기다렸다.
 “잘잤어요, 윤겸씨?"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발목까지 오는 긴 원피스에 두꺼운 니트를 입고 있는 그녀는 어제와는 또 다른 이미지였다. 메이크업 없는 맨 얼굴의 그녀가 나보다도 더 어린 대학생 같아 보였다.
 “날씨 너무 좋죠? 오늘은 백록담도 보이겠어요."
그녀는 잼과 버터를 듬뿍 바른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입을 오물거렸다.
 네. 조금 있다가 한림공원에 가려구요.
 “아, 정말요? 한림공원 좋죠. 사진찍을대도 많구!"

그리고 그녀는 식당 입구를 한 번 보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해진씨한테 사진 좀 찍어달라구해요!"
 네, 네?
 “뭘 그렇게 놀라요? 아까 둘이 같이 나가는거 다 봤는데?"
그녀는 눈을 얇게 뜨며 날 향해 미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빠지지만 말아요."

 아니, 저기...
나는 그녀의 웃음에 당황해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해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어제 그녀의 이야기가 생각 났다.
 참,
 “윤겸씨."
그의 목소리가 들린건 내가 그녀가 어제 들려준 이야기에 대해서 물어보고싶어 입을 열려고 하는 그 순간이었다. 백사장에 나갔을 때보다 조금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사진기 가방을 메고 나온 그가 식당 입구에 서있었다. 사장님은 그를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미소 지었다.
 “다녀와요."
그리고 그녀는 남은 빵 조각을 입에 넣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어쩐지 서늘하고 쓸쓸해 보였다.

 바다는 왼쪽으로 펼쳐져있었다. 걸어가는 내내 주변 풍경을 보느라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계속 그래왔던것처럼 해진씨는 계속해서 어딘가를 찍으며 걸어갔고 나는 그런 해진씨의 뒤를 따라가다가 그가 자리에 멈추면 그를 앞서 걸어가곤 했다. 몇 분 뒤, 뒤에서 사진을 찍던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바다를 찍은 후 카메라를 내렸다. 한참 뒤에 서 있던 그는 내 쪽으로 걸어오며 빙긋 웃어 보였다. 바람에 언 두 볼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몸은 추위를 많이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얼굴과 손이 차가웠다.
 “신발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사실 점점 더 축축해지고 있다. 이미 양말까지도 젖어버린 것 같으나 아주 조금씩 마르기만을 바라고있다.
 “다행이다."
그는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왔다. 이렇게 보니 그는 내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볼 정도로 컸다. 그의 붉어진 볼은 창백한 얼굴에 연한 동백꽃물이 물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왼쪽 손에 사진기를 들고 있었지만 이내 다시 카메라를 들고 어딘가를 찍었다. 그리곤 나를 다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발짝 거리에 서 있는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는 허리를 굽혀 내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했다. 오른쪽 입고리는 장난스럽게 올라간채로.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아니요.
그의 행동에 놀란 나는 한 발짝 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똑바로 서서 고른 치아를 보이며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나는 그대로 다시 그를 등지고 앞으로 걸어갔다. 바람소리에 묻혔지만 내 뒤를 따라 오는 그의 발소리가 연하게 들린다. 나보다 보폭이 훨씬 큰 그가 어느새 내 옆에 서서 걷게 되었다. 이제 그는 사진기에 풍경을 담기보다는 눈에 담으려는 듯 먼 바다를 오랫동안 보기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가끔 나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윤겸씨가 몇 살이라고 그랬죠?"
 23살이요.
나의 대답에 그는 놀란 토끼눈처럼 동그랗게 뜨고 다시 한 번 나를 내려다 보았다.
 “아, 그랬었죠!"
 기억하고 있었던거 맞아요? 아닌거 같은데.
내가 눈을 얇게 뜨고 올려다보자 그는 당황해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차분한 척 했다.
 “어때요? 23살 되니까."
나는 그의 갑작스런 질문에 머뭇거렸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좋아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사회에 대한 부담을 어깨에 짊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휴학생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부담감보다는 덜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부담이 내게 다가 온 듯했고 실로 그랬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앞으로의 내 모습을 그려보기 위해서 여행을 하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방금 한 그의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거짓이었다.
 “좋겠다, 진짜."
그의 말에 달리 할 말이 없어 나는 미소만 지었다.
 해진씨는 어땠어요, 23살에.
 "음..."

나의 물음에 그는 한참 과거를 헤엄치는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복학하고 사진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하다 보니까 재미도 있고, 신기하기도했고... 그래서 활동을 계속했었죠. 그리고 제가 태어나서 그렇게 미쳐있었던 일은 처음이었어요.”
 네.
“그리고, 뭐... 좋아하는 사람도 만났었고요."
 아,
허공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그녀를 만났던 23살로 돌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입에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해졌다.
 많이 좋아하셨나봐요.
 “많이, 많이 사랑했죠."
 그랬군요.
그는 다음 말을 이으려 입을 열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어제 제가 말했던거처럼 되어버렸네요. 미안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한참 쳐다보았다. 어제 말했던거라면,
 이기적이라는거요?
그는 뒷목을 긁적이며 무안해했다.
 “하하, 제 이야기 잘 안 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오늘 윤겸씨한테 먼저 털어놓고있네요."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엷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어느 새 두 사람은 한림공원에 도착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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