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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an 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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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공원



 겨울 속의 한림공원은 적막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누군가가 심기 시작한 야자수와 꽃과 나무들로 이뤄져 있다. 공원 초입엔 곧게 뻗은 야자수와 종려나무 길이 펼쳐져 있다. 길 위에는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야자수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있는 듯 보였고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나 또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박해진씨는 길쭉하게 뻗어있는 나무와 노랗게 피어있는 꽃을 아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와 그, 둘 사이에는 바람소리와 나의 탄성 외에는 공기 중에서 대화가 오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야자수 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면 산야초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입구엔 노랗게 피어있는 꽃들과 산야초원(山野草園)이라 적혀 있는 커다란 현무암이 놓여 있었다. 나는 잠시 자리에 서서 입구를 눈에 담기 위해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내가 길 위에서 발을 멈추자 뒤를 따라오고 있던 박해진씨와 나의 거리가 가까워졌고 이내 나의 오른쪽에 섰다. 옆으로 온 그를 올려다 보며 빙긋 웃자, 그 또한 나를 내려다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이내 카메라를 들어 입구를 찍었다.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그의 옆을 스쳐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겨울의 초원은 아무리 따뜻한 제주도라 해도 여름의 푸릇함 보다 못하다. 키 작은 나무 근처엔 난초가 자라기 시작한 것이 보였으나 아직은 이른감이 있다.

 “왜 그래요?”

겨울이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바랐던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나보다. 해진씨는 주변을 둘러보다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겨울인걸 알면서도 왠지 큰걸 바라고 왔나 봐요. 실망하고 있네요, 저.

그러자 그는 하하, 웃더니 허리를 굽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윤겸씨, 꽃도 좋고 나무도 좋지만 여길 둘러싸고 있는 돌들 좀 봐봐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초원의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돌들은 다름아닌 돌 하르방이었다.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동작을 하고 서 있는 돌 하르방은 건조한 초원 위에서 푸른 나무와 꽃들이 자라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까지는 그들이 주인공인 샘이다. 아니, 어쩌면 그 곳에 서 있는 자체만으로 그들은 사계절 내내 주인공이다. 나는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아아,

다양한 모습의 돌 하르방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손으로 하트 모양을 내고 활짝 웃으며 서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자한 미소의 돌하르방과 달리 너무 귀여운 느낌까지 들었다.  그 때, 박해진씨의 셔터 소리가 등 뒤에서 여러 번 울렸다. 돌아보자 그의 카메라는 먼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순간 그는 사진기에 무얼 그렇게 담고 싶은 것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여행은 단순한 ‘여행 ’일 뿐인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도 제주도가 다른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찾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마침 그의 카메라는  이내 또 다른 피사체를 찾으려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동그랗고 큰 눈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를,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 또한 카메라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나와 그, 둘 사이의 시간만이 멈춘 듯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그것이 비록 몇 초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시간이 꽤 오래 걸린 듯 한 느낌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천천히 내렸고 이내 그는 카메라가 아닌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나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가, 갈까요?

나는 손으로 반대 쪽을 가리키곤 휙 뒤로 돌아 서서 먼저 걸어갔다. 뒤에선 같이 가자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와 나는 초원을 돌아나와 협재굴을 통과해 나왔다. 겨울의 동굴은  따뜻했다. 협재굴, 쌍용굴과 황금굴을 통과하는 꽤 긴 구간이었다. 승후씨는 동굴 안에선 덥다며 벗었던 패딩을 굴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껴입었다. 나는 한림공원 입구에서 가져온 공원 안내도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 시기에 매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원 안에 매화 정원이 있대요.

 “그래요? ”

 네, 매화가 많이 피어 있나 봐요.

 “그럼 그쪽으로 바로 갈까요? ”

 좋아요.

정원으로 가기위해서 민속 마을을 가로 질러야 했다. 낮은 돌담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승후씨는 또 다시 카메라로 세상을 담았다. 아침에 사진 좀 많이 찍어 보내라는 엄마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나서 나도 휴대폰 카메라를 들어 찍을 피사체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에 비하면 너무 작은 것이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기억 속에서 잊혀질 이 장소를 사진으로라도 기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이 순간까지도. 그와 나 사이에는 한 동안 셔터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한참 사진을 찍다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와 같은 곳을 찍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보는 피사체를 내가 찍을 때도 있었고, 내가 보는 것을 그가 찍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카메라에는 어떻게 그 순간이 담겼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다 왔네요.”

제주도에서의 2월은 뭍에서의 2월과 확실히 달랐다. 뭍에서의 2월은 여전히 춥고 또 추운 겨울의 연속이다. 마침내 3월 초가 되면 엄마는 항상 집 앞에 서 있는 매화 나무 꽃이 피었는지 피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엄마는 매화향을 좋아한다. 꽃이 피는 시기가 오면 엄마는 ‘그야말로 매화 향에 취한다.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정원 입구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매화 향기가 코 끝을 간질였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 쉬었다. 달콤한 꽃향기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 몸에 퍼지는 듯했고 눈을 떴을 땐 팝콘 같은 매화 꽃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걸음을 걸을 때 마다 주위에 풍기는 꽃향이 옷깃에 묻어나는 듯 했고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꽃 내음은 점점 더 짙어졌다. 나는 얼른 다시 휴대폰을 켜서 매화 나무가 길 옆으로 주욱 펼쳐져 있는 장관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엄마에게 사진과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제주도엔 벌써 매화가 폈어.>

 “윤겸씨? ”

앞서가던 그가 뒤를 돌아보며 나를 불렀다.

 네.

바람이 불었다.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공원에 묻어있던 매화향기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향기가 묻은 바람은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옷깃과 젖은 신발을 스치며 지나갔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그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새로운 사람을 만났어.>

 단 향기를 가득 담은 두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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