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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Jan 09. 2017

영원한 이별에 대하여.

2016.11.19 ~ 2017.01.09


나는 이런 이야기를

내 주변,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는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어디라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다.

-


1.

 생각해보면 나의 첫 번째 이별은 내가 4살이나 5살 때 아빠의 큰 어항에서 살던 은색 붕어의 죽음이었다.

사진첩이 꽤 많이 있는 것을 보니 아빠는 사진을 찍는 것 또한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사진들 중에서도 어린 내가 붕어가 유영하는 어항 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습이나 물고기에게 밥을 주기도 하는 모습이 있기도 했다.

문득 내 기억의 파편에서 어느 날 물고기가 배를 뒤집고 헤엄치기 시작하던 날이 떠올랐다. 아빠는 어항 속에 있던 물고기를 다른 대야에 옮겨놓은 후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아빠가 그때 왜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물고기 약을 사러 갔다는 언니의 말도 얼핏 떠올랐다.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그런 물고기에게 계속해서 힘내, 아빠가 밥 사 온대, 힘내라고 응원을 했더랬다. 그러나 물고기는 입을 뻐끔 거리다가 끝내 움직임을 멈췄고 그때 마침 아빠가 들어왔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것이 밥이건 약이건 간에, 나는 아빠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왔더라면 이 물고기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마음에 한 동안 대야 속에 배를 보이고 움직이지 않는 물고기를 빤히 바라보던 게 생각이 난다.

그것이 어린 내가 겪은 최초의 이별이었다.


2.

 지난 11월 4일 금요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첫 번째 할머니가 아니라, 우리 아빠의 어머니. 작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학교에서 친구와 길을 걸어가다가 언니의 전화로 소식을 접한 나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나머지 전화를 하는 내내 온몸이 떨리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3.

성인이 되고 나서 겪은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 겪었던 어린 시절의 그것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머리가 큰 만큼 고인과의 추억이 더 많아진 나는, 철없고 어린 내가 아빠를 잃고 큰할머니를 잃었던 것 보다도 훨씬 더 힘든 순간들을 보냈다. 최근 할머니에게 연락을 자주 하지 못했던 내가 미웠고, 그 날 내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더라면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며 나 자신이 자꾸만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 날, 한 순간이라도 변화가 있었더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분노와 좌절, 증오 등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슬픈 감정은 며칠 내내 나를 괴롭혔다.


4.
첫 째날 장례는 치르지 못했다. 조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언니에게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을 땐 할머니 댁에서 자연사를 하셨겠거니, 향년 92세의 나이였으니 건강하게 잘 계시다가 가셨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동안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너무 갑작스럽다는 생각. 그리고 시외버스에 올랐을 때 언니의 전화를 다시 받았을 때 나는 언니에게 할머니를 어디에 모셨냐고 물었지만 오늘은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고 답했다.

 "왜?"

 "할머니가 약을 드셔서,..."

 "뭐?"

나는 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되물었고 언니는 다시 또박또박하게 답했다.

 "할머니가, 약을 드셔서, 지금 엄마랑 동네 사람들 다 같이 경찰서에 있어."

 "도대체 왜?"

 "일단 와서 말하자. 조심히 내려와."

전화를 끊자마자 참았던 울음과 할머니에 대한 미움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내 옆에 앉아서 같이 내려가던 사람이 보이지 않게 후드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창 밖을 보며 참으려 했지만 꺽꺽 대는 울음소리가 자꾸만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도대체 뭐 때문에, 무엇이 할머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것일 걸까. 고향으로 내려가는 내내 나는 입 속으로 '농약을? 어떻게 약을 드셔? 약을?' 이런 말을 반복하면서 실없이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울었더니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언니 부부가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의 언니가 묻는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입을 떼고 대답할 힘조차도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왔을 땐 그저 경찰서에 있을 엄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떻게 서든 참아내려고 했다. 형부의 안부도 애써 미소 지으며 답하려 노력했고, 오랜만에 보는 조카의 재롱에도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참고 있던 눈물은 엄마의 연락 -할머니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을 찾으라는- 을 받은 후, 형부가 찾은 할머니의 사진을 전달받은 뒤에 결국 터져 나왔다. 햇빛 때문에 눈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을 정면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그렇게 웃음 많은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내 휴대폰에는 한 장도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졌다. 결국 나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집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5.

엄마에게서 연락을 받은 시각은 거의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그러는 사이 둘째 언니가 도착했고 함께 장례식장으로 이동하였다. 가끔 조카의 재잘대는 소리로 정적이 깨지곤 했지만 식장으로 가는 내내 차 안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모, 증조할머니 어디 가셨어요?"

맑게 묻는 조카의 한 마디에 둘째 언니는 "하늘나라..."라고 말하다가 울컥,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곤 했다.


6.

식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왜인지, '장례식장'이라고 쓰인 차가운 지하실로 내려가도 할머니가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고, 절대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저곳으로 올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내린 나는 앞 서 걸어가는 언니들과 형부를 뒤따라 떨어지지 않는 발을 한 발 한 발 떼었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내려가는 길, 커다란 스크린에 고인의 성함이 적혀있는 걸 본 순간 나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울면서 식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딱 그 상황이었다. 모두가 내려간 계단에서 나는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삼촌이 도착하셨고 계단에 앉아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해 말없이 어깨를 두드리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당일이었지만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한 탓에 할머니는 텅 빈 그곳에서 모두를 기다리고 계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현실도 부정하고 싶은데 심지어 이런 부정하고 싶은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있는 이 상황 또한 슬펐다.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7.

 고향에 내려갈 때면 종종 엄마의 심부름을 다녔었다. 특히 할머니 댁에서 호박이나 감자, 배추 등 할머니가 농사지은 것들을 가져오거나 아니면 할머니께서 시내에서 사달라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가지고 할머니께 전달해드린다거나 하는. 그래서 어쩌면 언니들보다도, 내 동생보다도 할머니는 나와 조금은 더 가까운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기가 힘들었다. 수많은 물음표만 남겨놓고 떠나버린 할머니를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심지어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최근 연락을 하지 않은 나 자신도 미워졌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되돌아 나와서 장례식장 옆에 있던 빈 공터로 걸어 들어가서 그제야 큰 소리로,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8.
 큰아빠의 딸, 사촌언니가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큰아빠의 수술 소식을 전했다. 폐와 심장이 좋지 않아서 아주 큰 수술을 10월 31일에 할머니 몰래 받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걱정할 거라며 휴대폰까지 꺼놓고 아무도 모르게 수술을 진행한 것이다.


9.

그 사실 몰랐던 할머니는 사고 전날 큰아빠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다고 했다. 엄마도 그 사실을 몰랐으니 별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했지만 할머니는 계속해서 불안해하며 울었다고 했다. 그러다 할머니는 짜증 섞인 말투로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고. 그게 엄마와 할머니의 마지막 통화였다고 했다.


10.

그리고 사촌 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날인 11월 3일에 꾼 꿈 얘기를 했다. 큰아빠가 수술을 한 다음 날이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인 그 날 저녁, 언니는 저승사자가 큰아빠를 데리고 가는 꿈을 꿨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언니가 사자에게 큰아빠를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자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다음 날 약을 드셨다.


11.

 언니의 말에 따르면 큰아빠는 폐와 심장이 좋지 않아 큰 수술을 해야 했고 그날 왠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뵙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향에 내려왔었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날 큰아빠의 안색은 곧 떠날 사람처럼 좋지가 않고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코피를 많이 쏟아내기도 하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큰아빠는 할머니를 뵙고 돌아간 후에 항상 잘 도착했다는 안부 전화를 하는데, 그 날따라 할머니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된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연락이 없는 큰아빠에게 할머니는 매일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자 불안했을 테고 결국 나의 아빠처럼, 남은 아들마저 먼저 보내는 게 두려워 할머니 본인이 먼저 앞선 것이라는,

살아있는 자들의 추측이 난무했다.


12.

 장례식장에서 손님을 맞이하다가도 울컥울컥 눈물이 흘러나오고 오열이 터져 자꾸만 밖으로 나갔다가 울면서 들어오고를 반복했었다. 그러다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xx아, 아까는 너무 경황이 없었어서...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나는 말을 이을 수없었지만 친구는 그런 나를 위로해주었다.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친구의 기도를 들으면서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울어버린 것이다. 그러다 결국, 어린 조카와 같이 나를 찾으러 나온 사촌오빠에게 우는 모습을 들켜버리기도 했다.


13.

 장례식을 이틀밖에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시간은 꽤 빨리 흘러갔다.

그 날 저녁에 할머니의 입관식이 진행되었다. 엄마는 나를 말렸지만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뵙고 싶어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를 정말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그게 입관식이라는 게, 오랜만에 만나 뵙게 된 게, 그게 입관식이라는 그 사실이, 내 심장을 칼로 도려내 듯 아프게 했다. 나는 할머니가 그냥 주무시고 계시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가지려고,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내려 했다. 할머니 앞에서는 울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었다. 둘째 언니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더 많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손에 담으려 오른손을 이마에 살짝 닿았을 때, 그 짧은 몇 초 동안 느낀 할머니의 체온이, 살아있는 자의 기운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했을 때,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입관식에 들어가기 전, 이모들은 내게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니 세세하게 꼼꼼하게 잘 보고 나와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머리카락, 눈썹, 감은 두 눈, 오똑한 코며 입술, 작은 손과 발, 작은 몸,... 그 모든 것을 다 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자꾸만 눈물에 눈이 가려져 할머니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아 입관식장에서 나올 때 다시 한번 뒤로 돌아 할머니의 작은 몸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14.

 가족들은 새벽 1시가 되자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동생과 큰아빠의 아들, 딸과 함께 밤을 새웠다. 우리는 할머니의 손자 손녀들이지만, 친 사촌지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많은 시간들을 서로서로 불편해하며 보내왔다. 서로 연락도 하지 않은 채로 지내왔던 그 수많은 시간들을 비웃기라도 하 듯, 나와 동생과 언니 오빠, 네 사람은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짧지만 긴 하룻밤 내내,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추억거리로 서로를 위로했다. 


15.

동이 트기 전에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식장으로 다시 도착했다.

할머니 댁 앞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운구 버스를 타고 집 앞으로 갔을 때, 그 집의 모습을 나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니, 어쩐지 그 큰 기와집이 새벽 어스름에 물든 하늘 밑에서 아주 무섭게 우뚝 서 있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담벼락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마당엔 꽃 하나, 나무 하나 푸른 것이 없었다. 할머니 댁 마당은 가을과 겨울 사이여도 항상 초록을 띄고 있었는데... 마치 집주인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 터의 으스스한 기운이 마당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사라지게 만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늘한 칼바람은 저승사자가 부는 입김처럼 소름 돋게 날을 세워 제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밀어내려 했다.


16.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다시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한참 울다가 어른들의 부추김에 다시 일어나 할머니의 흔적을 보면서 하나하나 눈에 담으려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냉장고에 할머니가 드시면 안 되는 것을 그림으로 설명해놓은 것. 내가 할머니에게 일일이 설명해주면서 붙여둔 것이었다. 그리고 가스레인지 위에는 할머니 댁에 내가 가면 할머니가 항상 계란 프라이를 해줬던 프라잉 팬이 놓여있고, 내가 사다 드렸던 생수며 사과며 요구르트, 할머니 방에 놓여있는 비누 카네이션, 할머니의 이불, 옷... 할머니의 사진... 그냥 그 모든 것들이 할머니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다.

 "이거 내가 할머니랑 붙인 건데, 이거 할머니 컵, 할머니 그릇인데, 할머니, 다 있는데 할머니만 없어, 다 있는데, 할머니만 없어."

곡소리가 온 집안에 퍼졌다. 그냥 그 집 자체가 할머니였고 모든 것이 할머니와의 추억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마침내 부엌에 놓인 식탁을 발견했다. 그 위엔 잡초 제거용 약과 소주병, 젓갈이 말도 안 되게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커피믹스 두 개가 빈 상태로 쓰레기통에 넣어져 있었다. 나는 저것들이 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것들이구나, 하며 그것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기엔 하찮은 것들인 주제에 감히, 발 끝부터 머리 끝까지 피가 솟구쳐 오르면서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졌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도 쓰려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밖에서 어른들이 또 한 번 부추겼다. 운구 시간에 쫓겨 할머니를 짧게 추억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도 짜증이 났고 저 하찮은 것들이 할머니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분통했다.

할머니 집 터를 한 바퀴 돌면서 나는 할머니, 미안해를 반복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자꾸만 그 말만 나왔었다. 너무 무심하게 행동했었던 나 자신을 용서해줬으면 했다.


17.

 "머리도 좋아, 할마시... 그걸 어떻게 또 기억했대, 그래.."

 동네 할머니 중 한 분은 어느 날 마을회관에서 어떤 할머니가 언급했던 '약을 술과 함께 타서 마시면 몸에 빨리 퍼진다'는 말을 우리 할머니와 함께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잘 드시지도 못하는 술을, 그렇게 맛있는 음식도 속이 좋지 않아 잘 드시지도 않으시던 분이,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것들만 섞어서는, 그렇게 한 번에 드셨을까. 그런 말을 언니들에게 하자,

 "그래서 믹스커피 타서 자셨잖아..."

둘째 언니가 말했다. 언니도 그 커피 봉지를 발견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에서 분통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도대체 왜 그런 거냐고.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것들을,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랑 같이 섞어서 왜 그렇게 드셨냐고. 난,..."

그리고 이 이상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18.

 할머니를 발견한 엄마는 그 날 현장에 축축한 수건 두 장이 있었고 방바닥은 깨끗했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할머니 댁에 방문했을 때에도 방 안엔 수건 두 장이 구겨져있었다. 사람이 농약을 마시면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워 토를 올린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할머니는 언젠가부터 마을회관에서 본인에게 '할머니 냄새'가 난다느니 하는 젊은 할머니들의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댁에 갔을 때에도 종종,

 "회관에서 나더러 할매내 난다고 하대? 나나?"

이렇게 묻고는 했다. 할머니는 언제나 깨끗하고 단정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평생을 남들 눈치만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래서 끝까지, 깨끗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했나 보다. 그 수건으로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자신이 올린 것들을 닦고 또 닦으셨으리라. 그렇게 끝까지, 남들 눈치를 보면서, 자신을 발견할 사람들을 신경 쓰면서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가신 거다.


19.

운구 버스는 화장터로 이동했다.

아빠를 화장한 그 화장터였다. 모두가 힘이 없었고 모두가 우울했다. 나는 할머니가 누워계시는 관이 버스에서 내려질 때에도 아주 멀리서만 바라봤다. 더 이상 다가가기에는 안될 것 같은 나는, 죄인의 기분이 들었다.


20.

밤을 새웠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할머니가 불 속으로 들어가고 한 줌의 재가 되어 나올 때까지, 4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다들 졸려 바닥에 쓰러져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눈이 감기지가 않았다. 마지막이라도, 마지막이라도 할머니를 잘 모시고 싶었다. 물론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21.

인간은 죽으면 한 줌의 재가 된다.

재가 된 할머니를 보면서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너무, 재가 적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적었다.


22.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은 가족 납골당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셨고 놀러 다니는 것도 좋아하셨다. 그래서 답답한 납골당 안에 들어가서 갇혀있고 싶지도 않고, 큰할머니와 다시 만나서 또 힘들게 지내고 싶지도 않으니 그냥 선산에서 바람에 날려달라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소원대로 어른들은 할머니를 납골당에 모시지 않고 그 옆, 볕이 잘 드는 나무 아래에 할머니의 재를 높이 쌓아두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세월 동안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던 일이 많이 없으셨을 텐데.. 그렇게 사람들 시선을 두려워하며 눈치만 보면서 계시다가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야 사람들이 할머니의 원을 들어드리고 있었다.

다들, 살아있을 때나 잘 해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23.

다음 날 미국에서 고모가 한국으로 들어오셨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던 것인지, 할머니가 고모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었는지 몰라도 나무 아래서 할머니의 재가 우두커니 그대로 솟아 놓여있었다. 고모는 한참을 나무 밑에 서서 재를 보다 절을 올린 후 할머니를 흩으리며 마음에서 보낼 준비를 하셨다.

 "고모, 좀 울어."

 "뭘 울어, 비행기서 하루 동안 울었으면 됐지."

울음바다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엄마의 말에 고모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저 태연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24.

할머니 댁으로 집을 비우러 가는 길에 차 안에서 고모는 손등을 유심히 쳐다보며 무언가를 닦아내기를 반복했다.

 "아까 재 흩트리다가 손등에 튀었는데 이게 안 닦여 나가네."

정말 고모의 오른쪽 손등에 회색의 잿가루가 묻어 있었다. 아무리 손으로 닦아내도 떨어지지가 않았고 결국 고모는 손톱으로 억지로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고모, 엄마가 고모 왔다고 좋았나 보다."

 "좋기는 뭐가 좋다고!"

고모는 엄마의 말에 되려 나쁘게 대답했지만 자신의 뜯어진 손등을 자꾸만 매만졌다.


25.

짐 정리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집을 치우면서 힘들었던 것은 현장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것과 할머니와 우리의 추억들이 담긴 물건을 정리해야 하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할머니의 것이 많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든 게 빨리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산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그 말을 하면서 살아있는 자들은 뭐든 빨리빨리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정리를 하면서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26.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부터 나는 일주일이 넘도록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도무지 잠이 오질 않는 새벽의 연속이었다. 그럴 때마다 이 글을 써 내려갔고, 그러다가 다시 눈물이 나서 중단하고를 반복했다.

학교로 막 돌아갔을 땐 친구들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했고 친구들은 나와 함께 울어줬다. 슬픔의 연속, 불면증은 결국 매일 술을 마시게 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날엔 아침 6시가 되어서야 잠깐 눈을 붙였다가 2시간 정도 선잠을 자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문득 아무 이유 없이 온몸에 소름이 돋기도 했고 어두운 곳에 혼자 있지 못해서 매일 밤엔 친구들과 함께 있었고 항상 집을 나설 땐 불을 켜놓고 나서곤 했다. 어느 날엔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남자 형상을 한 검은 형체를 은연중에 보이기도 했고 고개를 돌려 그것을 제대로 보려고 했을 땐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주중을 보내고 주말이 되면 고향에 내려와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혹여 엄마에게도 나쁜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엄마는 할머니를, 목격했지 않은가.

엄마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빠의 죽음, 큰할머니의 죽음, 작은할머니의 죽음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확인한 사람은 모두 엄마였다. 그 세월 동안, 죽음이 엄마의 사람들을 데려갈 때마다 엄마는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엄마가 눈에 띄게 하루하루 몸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27.

절에서 초제를 지낼 때 나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절을 올렸다. 물론 처음에는 할머니를 원망하면서 영정사진을 응시하며 혼자 편하니 좋으시겠다, 편하시냐, 그래도 어떻게 약을 드시냐, 정말 원망스럽다, 그런 마음으로 절을 올렸다. 그러다가도 오죽 외로웠으면 그러셨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할머니 혼자 어찌나 외로웠을까 싶었다.

우리 어렸을 때는 할머니 댁에서 큰할머니, 작은할머니,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살았었는데. 할머니 두 분만 그 큰 집에 계시다가 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후에 거의 10년을 혼자 외롭게 사셨으니 말이다. 할머니 댁에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백미러로 할머니를 바라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눈물을 훔치시곤 하셨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그렇게 다그칠게 아니라 "왜, 할머니 왜 울어? 왜 그렇게 슬퍼?" 그렇게 한 번이라도 여쭤볼걸.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왜, 당사자가 망자가 되어서야 드는 것일까...


28.

12월 22일, 할머니의 49제 전까지, 나를 포함한 살아있는 자들은 열심히 살아내려고 노력했다. 나는 학교생활을 평소와 같이 해내려고 노력했고 주말엔 고향에 내려오길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면증도 점차 사라졌고 술을 마시는 날도 줄어들었다. 소름 끼치는 현상도 줄었고 갑자기 무서워지는 느낌도 점점 덜 들었다. 그리고 49제를 지냈고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29.

 새해가 밝았다.

이 글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쓰게 될 줄은, 앞 뒤가 맞지 않게, 이어지지도 않게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중에는 이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고 그에 따라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49제 전까지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지만 그냥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할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김하면서 오히려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30.

 지난 49일 그리고 오늘까지 이 글을 쓰면서 할머니를 애도하면서 살아냈다. 큰언니는 내게 49일이라는 기간은 애도기이기 때문에 망자와의 추억을 되새기고 그리워하면서 문득 눈물이 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49제가 지나고 해가 바뀐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눈물이 나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주신 이 세상을 더 열심히 살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장례 기간 중에 할머니와 나, 내 동생이 환하게 웃으면서 찍은 사진을 동생 휴대폰에서 확인했을 때처럼, 언젠가 할머니의 장난기 넘치게 웃는 사진을 또 보게 된다면 다시 눈물이 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눈물보다는 할머니 미소를 보며 나도 똑같이 미소 지을 수 있길 희망한다.

그렇게 나는 꿋꿋이 살아내보려고 한다.


-


그리고 할머니,

지난 92년을, 이승에선 한 순간도 맘 편히 지내지 못했지만 저승에서는 꽃길로만 걷고 아빠랑 할아버지랑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계시길 바래. 내가 많이 이기적이었던 거 다 미안해. 더 사랑해드리지 못해 미안하고 신경 써드리지 못해서 미안해. 그때, 할머니 말에 갑자기 짜증내고 소리 질러서 미안하고, 내가 제일 편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데 그 말을 괜히 내가 꼬아 듣기나 하고... 그래서 내가 소리 지르고 짜증내고 그런 거 다 미안해. 짜증내고 화낸 그 날은 내가 정말 미안해.

마냥 영원히, 같이 계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스스로 가실 줄 알았더라면 할머니 삶에서 할머니가 잘못한 거 없다고 한 번이라도 말해드릴걸 그랬나 봐.

할머니 탓 아니야. 할머니는 잘못한 건 없어.

할머니 시대 탓이고 그래서 할머니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탓이야.

그 긴 세월을 어찌 그렇게 불편하게만 살았어.

어떻게 그렇게 눈치만 보고 살고, 누구를 그렇게 미워하고 미움받고 살고 그랬어...? 그리고 결국 그렇게 삶의 끝까지 불편하게 가실 건 또 뭐냐고.

할머니.

불쌍한 우리 할머니, 좋은 곳에서 잘 지내고 계셔.

나는 이제 이 글 쓰고 나면 왠지 이걸 찾아 읽지는 않을 거 같아. 그냥 가끔 할머니 생각나면 밖에 나갈게. 바람이 불면 할머니겠거니 할게. 그냥, 이제 할머니 댁 동네에도 갈 일이 없어졌다는 게 그게 맘이 참, 안됐네. 할머니를 외롭게 했던 그 큰 집에도 갈 일이 없고... 참, 아빠가 만든 그 작은 집 옥상에 이끼가 많이 꼈던데. 그거 없애주고 싶은데,...

할머니.

편하게 가요.

나 앞 뒤도 안 맞고, 말도 이상하게 하고 그러는데, 그냥 할머니 보고 싶어서 쓰고 있어..

근데 할머니, 글을 못 읽잖아. 어떻게 해?..

미안해.. 끝까지 내 생각만 했다.

할머니 미안해. 나를, 우리를 용서해줘, 할머니.

사랑해. 사랑해.

그리고 다음 생에는 꼭, 제발, 행복한 시대에 행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행복하고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고 예쁘게 살아가 줘요, 제발요. 제발 행복하게요.

미안하고 사랑해, 고마워, 할머니.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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