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쓴지 2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야 낮에 받은 귤피차 생각이 났다. 식당으로 내려가자 주혁씨와 해진씨가 온돌 바닥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체스를 두고 있었는데 나를 발견한 주혁씨가 내게 손짓으로 인사했다.
사장님은 어디 계시구요?
“아, 아까 공항에 나갔어요, 곧 돌아올거에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주방으로 향했다. 머그컵에 따뜻한 물을 담고 해진씨에게로부터 받은 귤피차를 우려냈다. 따뜻한 물이 티백에 닿자 부엌 가득하게 차 향기가 물씬 퍼졌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시큼한 귤 맛이 입안에 감돌며 오래 남아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컵을 잡고 차가워진 손을 녹이며 부엌을 빠져 나왔다. 주혁씨와 다시 눈이 마주쳤고 인사를 하자마자 고개를 돌린 해진씨와도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내 두 손에 들린 컵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차 맛있어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내가 두 사람을 등지고 식당으로 빠져나가려는 찰나,
"아, 윤겸씨 잠깐만요!"
주혁씨의 목소리가 나를 멈춰세웠다.
"체스 둘 수있어요? 나 화장실 급한데. 내것 좀 둬줄래요?"
네? 저, 잘 못하....
"이기고 있어요, 지금!"
주혁씨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식당에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이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여전히 주혁씨가 나간 문을 뚫어지게 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해진씨는 '올라오세요, 하실 차례에요.'라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돌려 온돌 마루 위로 올라가 체스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숨을 고르고 그의 눈을 마주하고 피하기를 반복하다 그가 눈썹을 둥글게 올리며 미소지을 때 그제야 나는 시선을 체스판으로 내려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나이트를 이렇게..."
그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체스 판 위에 작게 놓여있던 검정색 말을 옮겼다. 보아하니 그 말을 움직인 까닭은 적진에서 홀로 살아 남아 이리저리 휘저으며 하얗게 빛나고 있는 퀸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리라.
그럼 저는...
마침 퀸은 다른 말들의 위협에서 잠시 벗어나있는 상태였다. 나는 아직 적진으로 들어가지 않은 흰색 말들 중 비숍을 움직여 방금 이동한 나이트를 잡았다.
"아하, 저런! 저런! 안돼!"
나는 작게 후후 웃었다.
"가까이 있는 것 피하려다 멀리 있는 말에 당했네요, 에이..."
판은 넓고 멀리 봐야하는 법이죠.
"하아, 그러게요."
그리고 그는 다시 고심하기 시작했다. 어떤걸 움직여야 저 퀸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다음 차례가 된다면 퀸을 뒤로 움직여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움직일것이 없다는 듯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봐도 그랬다. 한참을 고심하는 그에게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폰을 움직여보는건 어떨까요?
나는 나의 진영 안에 있는 그의 폰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는 마치 내가 이길 수 있는 답을 알려줄 것을 기대하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진지한 어투로 대답했다.
잡으려구요.
"어허, 이 사람 참, 그럼 안 돼요, 안 돼."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은 그의 말투에 웃음이 비져나왔다. 그는 다시 체스판으로 눈길을 돌렸고 한참을 다시 고심하던 끝에 킹의 옆에 있던 룩을 오른쪽으로 한 칸 옮겼다. 내가 봐도 도무지 그가 잡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아직까지 살아있던 퀸을 뒤로 옮겨놓았다. 숨통을 조이고 있던 퀸이 뒷 편으로 사라지자 그는 짓고있던 인상을 살짝 폈다. 그리고 킹을 호위하던 룩을 앞으로 쭉 밀어서 흰색 폰 하나를 잡았다.
"헤헤,"
그렇게 웃는 그의 표정은 마치 어린 아이가 오랜만에 갖는 성취 같아 보였다. 그러나 마침 나는 그의 킹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깨달았고 비숍을 킹 주변 가까이로 쭉 밀어 넣었다.
"어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그 때 마침 주혁씨가 들어왔다. 그는 체스판에 눈을 고정한 채로 신발을 벗고 걸어왔다. 상황을 파악한 그는 눈을 크게 뜨며 나와 판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선수였어요?"
"으아아... 졌네요, 졌어."
아직 모르죠, 끝까지 가봐야, 알지.
나는 다시 주혁씨와 바통 터치를 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라가요?"
네, 할 일이 좀, 있어서요.
"그렇구나. 잘 자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그, 폰 움직여보세요.
"안돼, 안돼요."
그는 손사레를 쳤고 주혁씨는 한 몇 초 동안 무슨 소린가 싶다가 체스 상황을 파악하곤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두 사람을 등지고 식당에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