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 Sep 26. 2024

도망친 자리에서 (2)

몽상과 꿈


 어린 시절의 꿈은 원래 소설가가 아니라 만화가였다. 세 살 터울인 오빠의 영향으로 알게 된 소년 만화책이, 어느 순간 아이의 마음속에서 선망으로 피어올랐던 순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감정만큼은 나에게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제일 처음 읽었던 책은 <드래곤볼>이다. <타이의 대모험>, <슬램덩크> 같은 작품들도 아주 재밌게 읽었다. 그러다가 <은비가 내리는 나라>를 접한 이후로는 순정 만화에까지 퐁당 빠져들었다.

 소년 만화의 이야기 주축이 ‘모험’과 ‘성취’라면, 순정만화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연애’였다. 매력적인 남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캔디 같은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서사들이 주류를 이루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나는 눈이 얼굴의 1/3을 차지하는, 예쁜 십대 여자애를 주인공으로 한 학원물을 그리고 싶어 했다. 교실에 있는 동안 쉬는 시간마다 연습장을 꺼내 낙서처럼 그림을 끼적였다. 어느 날은 야심차게 빈 종이에 컷을 나누고 머릿속으로 연상한 장면들을 어설프게 표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인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게 너무나도 어렵게 느껴졌다.

 당장 모아둔 용돈을 가지고 서점에 가서 만화 창작을 위한 책을 사 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바로 전 해까지 다녔던 미술학원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고개를 들었다.

 당시에 일 년 넘게 잘 다니고 있던 미술학원을 중도에 그만두게 된 건 전적으로 어머니의 의지였다. 이제 고학년이 되었으니 예체능 학원은 하나로 줄이고 공부에 좀 더 집중하라는 의도 하에, 어머니는 미술과 피아노 학원 가운데서 후자를 선택했다. 불행히도 나는 피아노에 도통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터라 내 의사와는 상반된 어머니의 결정에 무척 화가 났었다.

 화가 누그러든 계기는 어느 일요일 아침에 어머니와 함께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봤던 TV 프로그램, <아침마당>의 재방송이었다. 그날의 게스트는 그 시절,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한창 유명했던 이희아 씨였다. 방송 말미에 그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어머니는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는 예전부터 피아니스트를 동경했었어. 그때 엄마는 피아노를 배울 만한 형편이 안 돼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너랑 오빠는 취미로 잘 배워두면 나중에 좋을 거야.“

 연주가 끝나갈 때 즈음, 어머니가 넌지시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나는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직장 생활과 집안 살림을 병행하느라고 늘상 바쁘기만 해 보였던 어머니에게 동경하는 세계가 있었다니. 어린 마음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그제까지 쥐고 있던 화를 스르륵 놓아 버렸다.


 비록 미술학원에 다니지는 못했지만, 중학생이 돼서도 여전히 손에서 연습장을 놓지 않았다. 좋아하는 만화책 속 캐릭터를 따라 그리거나, 학교 친구들의 캐리커처를 그리며 놀았다. 만화 축제에 가서 목각 인형을 사오기도 했다. 부모님 몰래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혼자 방 안에 있을 때마다 꺼내어 따라 그리기를 시도해 봤지만, 도무지 연습의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자꾸만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결국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실용성을 기준으로 취향을 재단하는 어머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용적인 편이었던 아버지에게,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집 안에서 둘 만이 남은 상황을 노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빠, 저 사실은 어릴 때부터 만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미술학원에 다녀 보고 싶어요.”

 전혀 예기치 못했을 딸의 말에 아버지는 곤혹스러운 감정을 얼굴에 내비쳤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이 부드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혹시 그 동안에 그려둔 그림이 있니? 우선은 네 그림을 먼저 보고나서 생각해 보자.“

 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 속에 보관해 두었던 그림들을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그 다음은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일말에 기대를 품고 있던 아버지의 표정이 실망감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나는 처참한 심정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우리나라에서 만화가를 직업으로 갖고 싶다면, 적어도 상위 5% 안에 드는 재능은 있어야 돼. 유감스럽게도 너에게 그만한 재능은 없는 것 같구나.”

 아버지는 감정을 꾹 누르며 말하고 있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수치심에 고개를 푹 떨궜다. 재능이 없는 채로 무언가를 원한다는 게 이리도 부끄러운 일이었다니. 그날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시선이 내 마음 속에 오래도록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이 완전히 꺾인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친구와 함께 만화 동아리에 들어가서 책을 내보자고 의기투합했지만, 이야기를 단 한 줄기도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의 수업 내용을 이해하는 지식의 영역과 별개로 머리가 텅 비어 있다고 느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꿈이 몽상이었다는 현실을. 나에게는 창작자로서의 재능이 전혀 없었다. 절망감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조용히 마음을 접었다.


 나중에 대학 진학을 한 이후에도 다시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는 욕구는 이상하리만치 일어나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