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심사
그러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갈망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세상을 ‘나’의 시선으로 온전히 바라보고 싶다는 바람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학교에 휴직을 신청했던 해에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라는 제목으로 소설 세 편을 완성했다. 당시에 유리의 파편처럼 흩어진 마음들을 하나의 서사로 엮을 수 없어 엉성하게 매듭짓긴 했지만, 그 이야기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언어로 담아내려 했던 첫 시도였다.
과거 내가 문예창작 대학원 과정을 수료했던 시기는 2014년이었다. 마지막 학기에 소설 합평 수업에서 내보였던 소설의 줄거리를 (유감스럽게도)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를 느낀 도서관 사서가 소설 속에서 걸어 나온 이상적인 외모의 남자와 끝이 정해진 연애를 하고, 이별과 동시에 직장에 사직서를 던진다는 내용이었다.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대상화된 이미지 속에 갇혀 있어요. 다음번에는 글을 쓰기 전에 인물의 내면에 천착하려는 노력을 해보세요.”
나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었던 이는 현역 소설가인 교수였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찌른 평가였지만, 나는 그 말을 올곧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상태가 아니었다. 마치 환한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원치 않게 치부를 드러내 보인 듯한 감정을 느껴, 그 뒤로는 감히 소설을 써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교수의 피드백을 수용하는 데 자그마치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세 편의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소외된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 나에게 글이 필요하다는 걸 더욱 확신했다.
논문 심사일에는 지도교수를 포함해 세 명의 교수로부터 평가를 받았다. 지도교수는 아무래도 내 글이 썩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흥, 교무실에서 선생님에게 왕따라도 당했나보지?”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동조를 구하듯 다른 두 명의 교수를 둘러보았으나, 누구도 호응하지 않았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다시 내 논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따끔거렸다. 교무실에서 점점 말을 잃고 고립돼갔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나머지 두 교수는 비교적 호의적인 입장에서 내가 글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첫 번째 작품에서 주인공이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더 구체화해서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상황에 대한 정치적 맥락을 고민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주인공의 문제 해결과정과 결말이 판타지적이라는 게 아쉬웠습니다.”
사려깊은 말이었다. 비판에도 상대를 향한 존중과 배려를 담을 수 있다. 덕분에 나는 부드러운 손길에 위로받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치적 맥락’을 파악하라는 말이 복잡하고 어려운 미로처럼 여겨졌다. 아직 나에게는 미로를 통과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 선의로 위장된 거짓을 분별하고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저 한 줄기 투명한 햇살 같은 사랑을 원하고 있었다. 그날 심사를 마치고 2차로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심사를 봤던 교수 가운데 한 명이 나에게 위로를 건넸을 때, 잠시 마음의 어둑한 곳에 따사로운 빛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아까는 잘 참았어요. 지도교수가 얘기할 때 혹시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까 봐 걱정했는데.”
지도교수는 1차를 마치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술에 약간 취한 상태에서 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제 글을 어떻게 읽으셨어요?”
내심 칭찬을 바라며 던진 질문이었다. 손상된 인정 욕구를 채우고 싶다는 갈망. 그는 술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도 내 욕망을 읽은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애써 참았을 법한 말을, 나의 취약한 자존심을 향해 정확하게 내리꽂았다.
“아니, 국어 교사라는 사람이 문장을 그렇게밖에 못 써요?”
그 순간에 정말이지 깊은 수치심이 밑바닥에서부터 나를 훑고 지나갔다. 괜찮아. 나는 우는 아기를 서툴게 달래는 엄마처럼 자신을 향해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도를 알지 못했다.
자리를 파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역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교수가 돌연 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까는 제가 무례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원래 무례한 사람들은 사과를 하지 않는 법인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거기에 더해서 직전에 그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을 아직 인정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목소리에 힘을 실어 이렇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저는 상처 받지 않았어요!”
교수는 눈을 꿈뻑이며 잠깐 동안 황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뒤에,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등을 돌려 사라졌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남편은 이미 안방에서 선잠이 든 상태였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막 열었을 때였다. 선반 가운데 케이크 상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눈시울이 시큰해진 채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잘 준비를 마쳤다.
“왔어? 너 오면 같이 축하해주려고 케이크 사 놓고 기다렸는데…….”
남편이 내가 온 기척을 느꼈는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이 시간까지 도대체 뭘 하고 온 거지?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서글픔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 뒤에 졸업식을 앞두고, 대학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올해에는 졸업식을 생략합니다.
그렇다면 함께 논문 심사를 받았던 사람들과 만나서 억지로 괜찮은 척 웃지 않아도 되겠구나. 문자를 받고서 나는 아쉬움 대신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