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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Jan 08. 2024

꿈꾸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

영화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 (2002) / 넷플릭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어 봐요.



 이 영화는 동화 <신데렐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만든 작품이다. 10여년 만에 전쟁으로 실종되었던 남편의 전사 통지서를 받게 된 노년의 여성 '에이다 해리스'가 우연한 계기로 꿈을 갖게 되면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인 에이다를 포함한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하나같이 동화 속 세계에서 튀어나온 듯 선량하고 매력적이어서,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겨울날에 포근한 담요 한 장을 몸에 두른 듯한 기분이 든다. 현실의 각박함 속에서도 인간의 선의가 믿고 싶어질 때, 언제든 보면 좋을 만한 영화다.


1. 에이다는 왜 파리에 갔을까?

 상실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형태로 말이다. 에이다의 경우에는 남편이 2차 세계대전 때 공군으로 참전했다가 실종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녀는 런던에서 가사도우미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10년 넘게 아무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중이다. 어쩌면……, 남편이 살아 돌아올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차마 떨쳐낼 수 없었던 탓이다. 마침내 우편으로 전사 통보를 받고 나서야,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가장 가까운 친구 바이에게 “이제, 끝난 거네. 난 자유야.”라고 말한다.  


 그렇게 에이다는 남편을 온전히 잃었다는 슬픔과 그리움 속에서 평소와 같은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이 일하던 저택의 방안에서 의자에 걸쳐 놓은 드레스 한 벌을 발견하고, 대번에 그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에이다가 첫눈에 반한 크리스찬 디올의 라비상트 드레스

 이 드레스의 제작사는 명품 브랜드인 크리스찬 디올로 매장이 파리에 있는 데다 가격이 무려 500파운드에 달한다. 현재 에이다의 형편에서는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꿈의 속성 아니겠는가?

 그날 저녁 그녀는 드레스의 이름인 '라비상트'를 외치며 비장한 표정으로 축구 복권을 들여다본다. 결과는, 놀랍게도 당첨이다! 당첨금은 150파운드. 하지만 얼마 뒤에 바이와 함께 또 다른 친구인 아치가 일하는 개 경주장에 놀러갔다가, ‘오트 쿠튀르'라는 이름을 가진 개에게 무모하게 배팅을 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100파운드를 날리고 만다. 이때 크게 낙심한 에이다를 향해 아치가 다가와서 다정하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꿈을 꾸는 건 잘못이 아니에요."

에이다를 위로하는 아치. 아치에게도 한때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한편 에이다는 드레스의 주인인, 고용주 뉴컴의 아내에게 밀린 급료를 요구한다. 안타깝게도 뉴컴의 아내는 에이다에게 돈을 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인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정산을 미루고, 심지어는 근무시간을 줄이겠다고 에이다를 협박하기까지 한다. 그녀의 이런 막무가내식 태도에 에이다는 어쩔 줄 몰라하며 울상을 짓는다.


 다행히 에이다가 실의에 빠져 주저앉기 전에 그녀의 앞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온다. 마치 동화 속에서 신데렐라가 계모와 언니들의 방해로 인해 무도회에 못 갈 위기에 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모요정이 짠 하고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다. 남편의 사망 시점이 확인되면서 그 동안에 밀린 유족 연금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치의 도움으로 개 경주장에서 잃은 줄로만 알았던 100파운드까지 돌려받는다. 덕분에 그녀의 수중에 파리행 비행기 티켓과 드레스를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모인다. 그러니 이제 떠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2. 디올 드레스에 담긴 마음

 파리에 도착한 에이다는 지하철 역사에서 만난 노숙인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디올 매장에 입성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차림새를 못마땅하게 여긴 매장의 중간 관리인 마담 콜베르가 제지를 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문전박대를 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때 가까이에서 둘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한 노년의 신사, 샤사뉴 후작의 도움으로 에이다는 무사히 컬렉션을 관람하고 드레스를 선택한다.

 마담 콜베르와 몇몇을 제외한 디올의 직원들은 명품 매장에 갑자기 등장한 런던의 가사도우미, 에이다의 존재를 흥미롭게 여긴다. 개중에 회계 담당자인 포벨은 오트 쿠튀르 드레스의 제작을 마칠 때까지 에이다가 자신의 집에 머무를 수 있도록 기꺼이 방을 내어주며, 모델인 나타샤 역시 에이다에게 호감을 드러내며 가까워진다.

에이다가 나타샤의 차 안에서 발견한 사르트르의 『존재와 비존재』. 극중 나타샤와 포벨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인 동시에 작품의 주제의식을 대변한다.

 그밖에 디올의 직원은 아니지만 에이다에게 관심을 보였던 또 한 사람, 샤사뉴 후작이 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한 에이다에게 분홍색 장미를 건네며 둘 사이에 핑크빛 로맨스의 기류가 흐른다. 이처럼 에이다는 파리에서 친절하고 매력적인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야말로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낸다.


 이때 마담 콜베르가 에이다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부자도, 귀족도 아닌 당신에게 디올의 드레스가 왜 필요한가요?"

 마담 콜베르의 지론에 따르면 디올의 드레스는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빈 오페라나 퀸 샬럿 무도회처럼 드레스가 빛을 발할 수 있는 장소에서. 그런데 부자도, 귀족도 아닌 에이다가 드레스로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마담 콜베르는 이 의문에 대해 이미 'NO'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다. 그렇기에 한껏 비아냥대며 회의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본다.

 실은 나 역시도 마담 콜베르와 관점은 다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에이다의 꿈에 대해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비록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성실한 인품을 가진 에이다가 꾸는 꿈이 왜, 고작 명품 브랜드의 드레스여야 하는 거지? 조금 시시한데,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에이다는 마담 콜베르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드레스는 내 꿈이에요. 내 돈도 다른 사람들의 돈과 같아요."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언급한 '다른 사람들'이 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라비상트 드레스의 주인인 뉴컴의 아내다. 그녀는 에이다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제때 돈을 주지 않고 부려도 되는 '가사 도우미'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에이다는 자신을 향한 뉴컴 부인의 시선을 거부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영화 초반에 에이다가 친구 바이와 함께 재향군인들이 즐겨찾는 바에 놀러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남자들이 아무도 둘에게 춤을 청하지 않는 상황을 두고, 그녀는 친구 바이를 보며 이렇게 탄식한다. "이게 우리 모습이야. 존재감 없는 여자." 이때 그녀가 자신의 존재감을 평가하는 준거는 전적으로 남자들의 시선이라고 볼 수 있다.  

에이다와 대조되는 바이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그건 너고, 나는 존재감이 풍만해."

  이쯤되면 에이다가 왜 그토록 디올 드레스를 갖고자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더 이상 타자의 욕망 안에 자기를 가두지 않고, 주체로서 자기 삶을 당당히 사는 것이다.


3. 꿈이 바꾼 현실

  결국, 에이다는 꿈에 그리던 디올 드레스를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온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삶은 파리에 다녀오기 전과 별반 달라진 점이 없다. 그녀는 여전히 남의 집을 청소하고, 옷을 수선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번다. 하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그녀가 뉴컴의 저택에서 라비상트 드레스를 처음 발견했던 날로부터 말이다.

 

뉴컴의 아내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밀린 임금을 기한 내 지불해줄 것을 단호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친구가 생겼다. 나타샤와 포벨, 그 외에도 디올의 직원들까지. 에이다의 꿈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오랜 친구 바이와의 끈끈한 우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에이다가 힘들 때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 기쁨의 순간을 함께 나눴다.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돌보는 삶을 스스로 긍정하게 됐다.
다시 사랑을 시작했다. 에이다는 샤사뉴 백작의 호의가 어린시절에 그를 돌봐주었던 보모로부터 비롯된 감정이라는 진실을 알고, 관계를 정리한다. 런던으로 돌아온 이후 재향 군인회 댄스파티에서 디올 드레스를 입고서, 일찍부터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었던 아치에게 춤을 청한다.
에이다의 삶에서 다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영화를 다 보고나서 ‘봄은 겨울이 꾸는 꿈’이라는 프롬의 노래 제목이 생각났다. 만일 겨울이 봄을 꿈꾸지 않았더라면 겨울은 영영 겨울인 채로 남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에이다는 꿈을 꿈으로서 봄처럼 아름다워졌다. 그녀의 꿈 이면에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열망의 본질은 결국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향한 사랑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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