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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Dec 22. 2023

국수의 맛

일상 에세이

 석 달쯤 전에 동네 마트에서 홍두깨 하나를 구입했다. 집에서 칼국수를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은 엄두가 나지 않아서 나는 홍두깨를 주방 서랍장의 맨 마지막 칸에 고이 보관해 두었다. 일단 집에 가져다 놓았으니 머지않아 사용하게 될 것이었다. 마치 체호프의 총(극의 1막에서 총이 소개됐다면 2막이나 3막에서는 총을 쏴야 한다)처럼. 이제까지 종종 그래왔듯이 게으른 자의 기지를 발휘하여 미래의 나에게 그 일을 맡기기로 했다.

 그러다가 11월의 마지막 날을 며칠 앞둔 월요일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어쩌면 오전에 내린 비가 영향을 미쳤을런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에는 아무래도 따끈한 국물 요리가 입에 당기기 마련이니까. 시계가 정오를 막 넘겼을 즈음 나는 밖으로 나가서 밀가루와 날콩가루를 사 왔다. 그런 다음 블로그를 검색하여 적당한 비율로 두 재료를 섞어 반죽을 만들었다.  노란 빛을 띤 반죽을 손으로 치댈 때마다 아주 익숙한 냄새가 올라왔다. 콩 비린내가 살짝 섞인 고소한 향. 거기에는 내 어린시절의 추억도 한데 스며있었다.


 밀가루에 날콩가루를 섞어서 칼국수를 만드는 방식은 경상도 태생인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아버지는 일요일 낮 시간을 주로 침대에서 보내곤 했는데, 이따금씩 마음이 내킬 때면 방에서 (공부하는 척)만화책을 보고 있던 나를 불러내서 함께 칼국수를 만들어 먹자고 제안하곤 했다. 내 대답은 언제나 오케이였다. 나는 아버지의 곁에서 소소하게 잔심부름을 하며 칼국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 크게 즐거움을 느꼈다. 단순히 내가 면 덕후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럴 때면 평상시에는 누가 대구 남자 아니랠까봐 무뚝뚝하기 그지 없었던 아버지가 아주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봐 주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눈길의 출처는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였다. 날콩가루를 넣은 칼국수는 생전에 그녀가 아버지에게 종종 별미로 해주던 음식이었다. 아버지는 그 시절의 추억을 나와 재현함으로써 그가 어린 날에 어머니에게서 느꼈을 법한 감정을 나에게도 불어넣어 주었다. 이제 나에게 아버지와 더불어 국수를 만들었던 추억은, 맑은 날 거실의 커다란 통유리창을 투과하여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과 같은 따스함으로 남았다.


 나는 부엌에서 홍두깨를 꺼내 반죽을 얇게 편 다음 차곡차곡 접어 면을 썰었다. 나무쟁반 위에 면들을 풀어서 펼쳐 놓는 동안에 불쑥 낯선 생각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만일 나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 다정한 세계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새삼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결심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다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운 상념이 그 순간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지나갔을 따름이었다.

 

 냄비에 표고버섯을 비롯해 몇 가지 채소와 육수 코인을 넣어 멸치 국물을 냈다. 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려 쟁반에 펼쳐두었던 면을 집어넣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증기를 타고 맛있는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면발이 익어가는 사이에 양념 간장을 만들고 김치를 썰어 그릇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국수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서재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남편을 거실로 불러들였다.


 “맛이 어때?"

 “음, 좋아."

 그간의 경험에 비춰 봤을 때 그가 이 정도 수준에서 좋다고 말하는 건 뭐, 그냥저냥 먹을 만하다는 의미였다. 몇 시간을 준비한 내 입장에서는 다소 김빠지는 반응이었지만, 남편이 평소에 나처럼 면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뭐, 그냥저냥 이해해 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몹시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탐욕스러운 심정으로 젓가락을 들어 입안에 칼국수를 후루룩 밀어넣었다. 그 즉시 면에서 나는 날콩가루 특유의 풍미와 야들야들한 식감이 혀를 자극했다. 그래, 이거지. 자연스레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내가 잘 아는 국수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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