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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Feb 15. 2024

좋은 사람

일상 에세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은 유기견 보호소에 간다. 봉사에 처음 발을 들인 시기는 재작년 11월이었다. 인원이 없을 때는 모임장인 D와 둘만일 때도 있고, 참석자가 많을 때는 네다섯 명이 모이기도 한다.

 봉사하는 곳이 화성시 외곽에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매달 모이는 인원에 따라 모임장인 D와 나눠서 차량 픽업을 맡게 됐다. 자원 봉사자들은 대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 되는 사회 초년생들인 경우가 많다.

 “몇 년 전까지 교직에 있다가 지금은 일을 그만 두고 쉬고 있어요.”

 처음에는 무구한 얼굴로 나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는 어린 친구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썩 편하지는 않다. 비뚜름한 자존심이 뱃속에서부터 비죽 올라와서. 그래도 말하려고 한다. 아무 것도 아닌 현재의 내 상태를, 다른 이들이 어떻게 바라보든지 간에 적어도 나 자신 만큼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보호소에 도착하면, 철문 안쪽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견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큼 몸집이 작은 개들 20여 마리 정도가 소장님이 거주하는 안채의 마당에서 지낸다. 견사 안에는 대략 70여 마리의 개가 있다. 모두 한 번 이상 주인에게 버려진 개들이다. 내가 똥을 치우거나 사료를 주기 위해 철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개는 잽싸게 견사 한쪽에 있는 작은 집으로 몸을 숨긴다. 또 어떤 개는 위협하듯이 짖기도 한다. 어떨 때는 그 모습이 꼭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봉사를 하러 오게 됐어요?”

 나는 봉사를 하러 온 친구들에게 이 질문을 자주 한다.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 둘 중에 하나다. 개를 너무 좋아하거나 봉사를 하러 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물론 둘 다인 경우도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나러 왔다는 얘기를 들으면 내심 기분이 복잡해진다. 내가 아주 높은 확률로 그런 기대를 가진 상대를 실망시키리라는 사실을 잘 아니까.

 한편으로는 좋은 사람이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는 약간은 뻔한 듯 하면서도 의외로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을 나에게 던져보기도 한다.  

 우선 네이버 검색창에서 ‘좋다’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생각보다 의미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다양한 의미들 가운데서 ‘좋은 사람’을 설명하는 내용에 가까운 것으로 범위를 좁혀보면, ‘성품이나 인격 따위가 원만하거나 선하다’, ‘말씨나 태도 따위가 상대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아니할 만큼 부드럽다’ 정도가 될 것이다. 여기에 대체로 부합한다고 할 만한 사람들이 몇몇 떠오르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에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현 시점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내면에 실재하는 분노나 미움을, 없애려하기보다는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감정의 주인으로 살고 싶어서다. 내적 현실을 부정한 채로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속이거나, 혹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완벽주의의 덫에 빠지기보다는 모나고 깨진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래서 유기견 보호소에 계속 마음이 이끌리는 게 아닐까? 보호소라는 공간은 버리는 마음과 버려진 마음, 양자를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장소이니 말이다.


 작년 10월 즈음에, D와 일정이 맞지 않아서 혼자 봉사를 하러 갔다가 몹시 민망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오후 산책 시간에, 소장님이 나에게 리드줄 여러 개를 건네며 산책시킬 개들에게 달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한 번도 혼자서 해본 적은 없지만-원래 2인 1조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다른 봉사자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던 적도 있어서 어렵게 생각하지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웬걸, 견사의 문을 연 순간에 개가 탈출하는 일이 두 번이나 발생했다. 그때마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로, 허둥지둥 도망치는 개를 좇는 일을 반복했다. 두 번째는 보호소 삼촌의 도움을 받아서 금방 사태를 무마하긴 했지만, 나에게 일을 맡겼던 소장님에게 너무 송구스럽고,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모습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과없이 노출했다는게 부끄러워서 그럴 수만 있다면 자리에서 확 증발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보호소 삼촌이 나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개들이 도망칠 수 있는 통로의 문들을 우선 닫아 잠그고, 개들이 힘을 뺄 때까지 조금 풀어주는 편이 좋아요.”

 나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에는 감정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꺼림칙한 감정이 마음에서 일어났을 때에도, 그것을 당장 치워야한다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억압하기보다 여유를 두고 감정의 모양새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가? 앞서 제기했던 질문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보면 ‘자기 마음을 소외시키지 않고,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글쎄. 여전히 내 안에는 들여다보기 어려운 내면의 문제들이 있고, 꼭 그 만큼 세상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좋은 사람이라고 편히 말하기 어려운 면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적어도 이 글을 쓰면서, ‘좋은 사람’이 아닌 내가 조금 더 좋아졌으니,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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