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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Mar 08. 2024

<테드 래소>와 수치심 마주하기

일상 에세이

 어제 아침에 나는 남편과 함께 밥을 먹으며, 애플TV로 <테드 래소>를 보고 있었다. 미국에서 유능한 미식축구 팀 감독이었던 ‘테드 래소’가 런던으로 건너가 영국 프리미어 리그 팀 ‘AFC 리치먼드’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유쾌하게 그린 휴먼 드라마다. 매 회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에피소드를 전개하는데, 어제 내가 본 회차의 주인공은 ‘네이선 쉘리’였다.

 네이선은 원래 리치먼드 팀의 킷맨이었다가 테드 래소의 인정을 받아 코치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나중에는 선수 간에 화합을 중시하는 테드 래소의 방식을 부정하며 라이벌 팀인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된다.


 - 여자친구와 중요한 일이 생겨서, 죄송하지만 오늘은 초대에 응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TV 속 장면에서 네이선은 웨스트햄의 구단주 ‘루퍼트’가 기다리고 있는 바에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며 약속을 취소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루퍼트는 네이선이 그해 뛰어난 실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직을 박탈해 버렸다. 감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데 따른 복수를 한 셈이다. 정작 본인은 과거 네이선이 회의를 주관했을 때 아무 이유도 밝히지 않고, 갑자기 의사를 바꿔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황망하게 웨스트햄에서 쫓겨나는 네이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밥을 먹다 말고 퍼뜩 생각이 튀었다.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돼. 아, 이게 바로 특권의식이었지. ‘나’와 ‘너’ 사이에 우열을 가르려는 속성이자 피해의식의 동반자.


 <테드 래소>에서 네이선은 어린 시절부터 늘 아버지에게 ‘너는 부족하다’는 질책을 받으며 자란 탓에, 열등감을 안고 사는 인물이다. 수치심으로 크게 상처 입은 마음은 우월감을 필요로 한다. 그가 루퍼트에게 마음이 이끌렸던 이유다. 한편 루퍼트의 경우에는 자신이 우월하다는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내세우고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자신의 수치심을 부정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수치심을 전가하는 방식이다.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돼’라는 명제는 유지한 채 ‘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세상과 투쟁하는 방식이다. 한 마디로 그는, 이겨야 사는 남자다.


 세상에 수치심 없는 사람이 있을까? 당연히, 그런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에게는 수치심이 없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내 안에는 네이선과 루퍼트의 얼굴이 모두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괴롭혀 온 ‘나는 부족한 사람이야’라는 내적 신념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싸웠더니, 어느새 루퍼트의 얼굴까지 갖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돼’라는 명제에 대한 분노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수치심이 만들어 낸 환영들 안에 가려져 있던 나의 진짜 민낯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우리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므로.


 동의는 전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자신의 존재 안에 생긴 커다란 흠집을 그대로 가진 채, 상처 입은 우리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데렐라와 그 자매들』, 앤‧베리 율라노프 공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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