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No feeling is final.
불현듯 과거의 우울했던 기억이 생각나면서 끊임없이 침잠하는 기분을 어찌할지 모르겠는 날이 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별로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를 화나게 하려고 벌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 평소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말에 날 선 반응을 하게 되는 날. 나에게는 어제가 그런 하루였다.
이런 날에는 괜히 나도 모르게 삐딱선을 타게 된다. 부정적 감정이라는 점만 똑같지 과거에 나에게 비슷하게 나쁜 감정을 주었던, 결이 다른 일들까지 수면 위로 끄집어낸다.
가끔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불필요하게 다시 생각하고 곱씹는 나를 보면 화석을 캐는 고고학자가 생각날 때가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고학자는 인류의 역사 발견에 힘을 쏟는 반면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습관적으로 화석을 캐고(그것도 안 좋은 일들만 골라서!) 돋보기며 현미경이며 모든 도구를 다 동원해서 들여보고 있다는 점이다.
힘든 상황이 현재까지 지속되거나 나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과거의 상한 감정을 제대로 흘려보내질 못하는 것 같다. 관심을 더 달라고 떼쓰고 진상 부리는 어린아이가 아직 내 마음속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과거는 과거일로 흘려보낼 줄도 알아야 하는 법. Let bygones be bygones라는 영어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나처럼 상처를 잘 받고 상처 받은 일을 스스로 깊게 파고들고 곱씹는 경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너무 어렵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안 따라준다. 이 말을 처음 만든 사람에게 "아니, 그게 쉽게 됩니까?"하고 물어보고 싶다.
아무런 노력 없이 안 좋은 일을 쉽게 잊을 수 없고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사건을 더 강렬하고 오래 기억하는 게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 말을 만든 사람도 아마 맘고생을 깨나 하고 깨달음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울하고 힘들었던 기억을 파고드는 나쁜 버릇이 갑자기 도지는 날, 나는 영화 <조조 래빗> 엔딩 장면에서 인상 깊게 본 릴케의 시구절을 다시 찾아보게 된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일어나게 놔둬라. 그냥 나아가라. 어떤 감정도 끝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릴케는 어떤 감정도 최종적인 게 아니니 계속 나아가라고(keep going) 한다.
No feeling is final이라는 마지막 문장을 계속 음미하게 된다.
'그래,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부정적인 감정도 최종적인 것이 아니야. 감정은 곧 내가 아니다. '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뇐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우울한 기분도 나의 최종적인 감정이 아닐 테니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면서 Just keep going 해야겠다. 일단 첫 번째로 내가 보고 듣는 모든 정보를 선별적으로 취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아무래도 요새 넷플릭스의 <셀링 선셋>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면서 부정적 에너지가 머릿속에 가득 쌓인 느낌이다. 출연진들이 꼭 여고시절 이간질을 일삼던 친구들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동안 2주간 소홀했던 성경 읽기와 감사 일기도 다시 시작해야겠다. 내가 이미 가진 것, 감사할 일들을 떠올리면서 내 마음속 부정적 기운을 씻어내야겠다. 이왕 Just keep going 할 거면 긍정적이고 행복한 일들로 하루를 채우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부정적인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인생을 좋고 긍정적인 것들로 채워가야겠다고 다짐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