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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Jan 18. 2024

도파민 금식 일지 #1

2024.1.8 - 1.13 (6 days)

#0 [1.7 일요일: 도파민 금식 결심]


책 '도파민네이션'과 몇몇 유튜브 클립을 통해 도파민 금식을 알게 됐지만, 나는 금식할 만큼의 중독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독한 무력감과 우울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인정했다. 내가 핸드폰 중독으로 부작용을 겪고 있으며 금식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을.

도파민 금식의 원리는 간단하다. 쉽고 빠른 자극의 과도한 제공으로(=도파민 과다 분비) 망가진 뇌의 보상 체계를 정상화하는 것. 망가진 보상 체계는 계속 과도한 자극만 찾고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동일한 정도의 자극으로는 더 이상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아서 계속 자극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이 악순환은 끝이 없기 때문에 결국 중독자는 약에 절어 살면서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상태가(=도파민 결핍) 된다. 보통 도파민 금식을 4주 정도 하면 뇌의 보상 체계가 정상화된다고 한다.


* 증상(=도파민 중독 부작용): 우울감, 불안초조, 공격성 증가, 허무감

내가 우울해서 핸드폰을 보는 건지 핸드폰에 중독돼서 우울한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이래서야 술을 마셔서 부끄러운지, 부끄러워서 술을 마시는지 모를 인간이나 다름없다. 원인 규명을 위해 일단 핸드폰 사용을 줄여보고(=도파민 금식), 이걸로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 내 핸드폰 중독의 주된 사용처는 유튜브, 인스타, 웹툰, 사파리(무의미한 검색), 이메일(강박적인 반복 확인), 게임 등이다.


* 방법: 사용 가능한 앱과 사용 제한 앱을 정하고 일상의 루틴 만들기 

- 사용 가능한 앱: 날씨(10m), 교통(무제한), 메모+카카오톡(20m), 듀오링고(10m), 알람(5m), 오디오북(20m), 달력, 뱅킹 등

- 사용이 제한되는 앱: 사파리, 웹툰, 유튜브, 인스타, 이메일, 게임

사용 가능한 앱마다 허용 시간을 매겨서 계산한 결과, 교통앱을 제외하고 전체 핸드폰 사용 시간을 하루 1.5시간 이하로 제한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 루틴: 핸드폰 중독에 희생됐던 저녁 시간 되찾기

1. 7-10pm 운동, 독서, 글쓰기

2. 10-11pm 잘 준비: 스트레칭, 마사지, 일기 쓰기

 

변화: 도파민 금식을 결심하고 구체적인 방법론을 적으면서 무력감과 우울감이 약간 해소됐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었다. 우울하네, 무기력하네 징징대면서 유튜브와 인스타를 끝도 없이 새로고침하는 내 모습보다 지금의 내가 더 마음에 든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들 쉽게 말하지만, 사랑은 둘째치고 일단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려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실감이 필요한 것 같다. 좀 더 건강하고 희망적인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1 [1.8 월요일: 핸드폰 사용시간 50m - 교통앱 제외]

 

역시 첫날이라 한 주간 최저 사용시간을 기록. 핸드폰 생각이 나지 않도록 계속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함으로써 생산적인 오전을 보냄. 다만 생산적으로 살면서 핸드폰을 안 써도 기분은 여전히 초조함. 보통은 이런 기분이 들 때 곧장 폰을 들고 30분에서 1시간 정도를 죽이면서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지만, 이번엔 생각을 해 봤다. 왜 나는 불안할 일이 없어도 불안하고, 아무 이유 없이 만성적으로 초조할까. 불안한 일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to-do-list를 만들고, 숨 쉬듯이 들여다보면서 관리하는데. 그리고 깨달았다. 리스트에 과제가 추가되고, 그 과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는 자체가 나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을. 양날의 검이다. 그렇게 사는 덕분에 생산적으로 살아가지만 수명이 갉아먹히는 거다. 이 스트레스 자체가 고통인 동시에 내 효율성의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처리해야 할 일을 가로막는 사람/상황을 적으로 인식하고 분노를 끌어올린다. 그 분노 역시도 추진력의 원료가 된다. 대신 분노와 불안을 일상으로 품고 사니까 몸이 아프다. 그걸 알고 나니까 상황은 달라진 게 없는데, 갑자기 불안, 우울감, 짜증, 무기력이 한결 덜해졌다.


변화: 폰 대신 라디오 뉴스를 청취.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옴. 주로 식사 시간에 폰을 쓰고 싶은 욕구가 커지지만 라디오를 듣고, 책을 보면서 다스렸다. 평소 예상/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날 저녁에는 갑자기 차 시동이 안 걸리는 사태도 덤덤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2 [1.9 화요일: 핸드폰 사용시간 1h - 교통앱 제외]


오전 중에는 여전히 별 이유 없이도 아드레날린 수치가 치솟는다. 좀 심심하기도 하다. 날씨를 확인한 뒤 아무 생각 없이 웹툰앱을 클릭할 뻔했다. 김유신의 말처럼 내 머릿속에는 이미 폰을 꺼낸다 - 웹툰을 본다 - 유튜브를 본다 - 인스타를 본다 같은 환장대로가 만들어진 것 같다. 이메일 답장이 오지 않아도 덜 초조하다. 폰을 열 때마다 강박적으로 이메일을 체크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컴퓨터로만 확인하는 게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듯. 답장을 기대하면서 확인했다가 안 온 것을 보는 순간 심리적인 거절을 당하면서 멘탈 데미지가 누적되는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쓸데없이 물건을 사고 싶은 욕구도 덜하고, 식욕을 조절하기도 쉽다. 식구들의 식사 속도가 빨라 보통 10분만에 식탁을 떠나고 혼자 남겨지는데 그때부터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밥 먹고, 디저트 먹고, 과자 먹고, 과일 먹는 사이클을 돌리곤 했다. 하지만 이날은 밥과 디저트에서 바로 멈추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아이의 숙제를 봐주는 것도 좀 더 수월하다.


변화: 같은 시간을 자도 덜 피곤하다. 전반적으로 해야 할 모든 일이 덜 버겁고, 덜 짜증스럽다. 불필요한 욕구가 줄어들고, 통제력이 올라간다. 외부 자극을 덜 받으니까 내면이 더 평화롭다.


#3 [1.10 수요일: 핸드폰 사용시간 1h - 교통앱 제외]


욕망이란 거대한 원동력이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사람 속을 태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충족되는 순간, 그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정말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다면 은은하게 지속되는 만족감으로 마음을 덥혀줘야 할 텐데 막상 이루어지면 딱히 감흥이 없다. 욕망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대체로 우는 애한테 사탕을 물려주는 식이었다. 그렇게 가지고 싶어? 가져야만 진정될 거 같아? 그럼 가져야지 뭐. 사, 그냥. 그리고 나중에 옷장 한구석에 처박힌 물건을 찾아내고 어리둥절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런 걸 왜 샀지? to-do-list에 있는 과업들도 욕망과 비슷해서 처리될 때까지 사람을 불안 초조하게 만든다. 처리된 다음에는? 다음 과업이 필요하다. 이 수레바퀴는 수레를 끌고 가는 소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으니까. 다음에 할 일, 다음에 살 물건, 다음에 이룰 성취. 지속 가능하려면 과업에서 감정을 분리해야 한다. 여기 내 목숨과 존재 가치가 걸린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남으면 남는 대로, 오늘은 오늘 할 수 있는 만큼을 처리하고 나머지는 내일로. 그리고 가짜 욕망 퇴치. 남들과 얘기를 하거나, SNS를 보거나, 광고를 보면 욕망에 불이 붙는데 대개는 가짜 욕망이다.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난 욕구가 아니라 남들의 욕망 혹은 충동질이 투영돼서 오염된 결과물. 이런 걸 이뤄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건 당연하다. 애초에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으니까.


변화: 아침에 일어나기가 수월해졌다. 계획이 틀어지는 일이 생겨도 덜 짜증스럽고,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인다. 작년 11월에 아이디어를 적어두고 시작을 한참 미뤘던 단편소설의 첫머리를 썼다.


#4 [1.11 목요일: 핸드폰 사용시간 2h - 교통앱 제외]


결국 그 일이 일어났다. 퇴행. 낮부터 폰 사용량이 평소보다 많았다. 사람들과 약속을 잡느라 카톡으로 한참 시간을 보내고 쇼핑몰에 갔다. 닥치는 대로 구매하라는 자극이 네온사인처럼 번쩍거리는 장소. 뭔가를 산다는 것, 돈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부담이다.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는 것도 부담이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고, 하나를 고르는 순간 더 나을 수도 있는 나머지를 몽땅 버려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그래서 소비의 뒷맛은 씁쓸하다. 과연 최선의 선택을 했는지 100%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쇼핑 이후에는 여름 휴가지를 골라야 했다.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해서 새벽 3시까지 폰을 붙잡고 여행지와 숙소를 검색하면서 가격을 비교했다. 그 과정에서 남들의 후기를 샅샅이 읽으면 내 것이 아닌 욕망이 타르처럼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남들이 간다고 하면 전부 부럽고 좋아 보이지만, 정작 내가 가면 '이게 아닌데' 싶은 결과가 나오는 이유.


#5 [1.12 금요일: 핸드폰 사용시간 2h 40m - 교통앱 제외]


전날 자정을 넘겨서까지 폰질을 했기 때문에 이날의 사용시간은 한 주간 최고 기록을 세웠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하지만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6:30am에 일어났다. 기상 시간마저 밀리면 바이오리듬이 흐트러지면서 오늘도 제때 잠들기 어려울 테니까.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여행의 즐거움을 빼앗는다. 하지만 여행에 정답이 있나? 내가 선택한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최대한 즐겼으면 그게 최선의 선택 아닌가. 비용, 관광, 휴양, 음식, 물가, 쇼핑 모든 면에서 최고를 찾겠다는 욕심을 부리면 어디를 가도 실망할 수밖에 없겠지.


변화: 피곤하고 무기력하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2가지는 세금과 죽음이라는데, 도파민에 탐닉한 대가 역시도 그만큼이나 정직하게 찾아온다.


#6 [1.13 토요일: 핸드폰 사용시간 1h 22m - 교통앱 제외]


주말이라 만사가 느긋하다. 뒤로 갈수록 고삐가 느슨해져서 폰 사용량이 늘었다. 그래도 스트레스를 다루는 방식이 개선됐다. 가령 폰 사용량이 증가했다는 것/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하다면서 뒹굴거나 어차피 다 틀렸다면서 폭주하는 대신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네비가 엉뚱한 길을 알려줘도 쌍욕을 염불처럼 외는 대신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거슬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부들대면서 숨은 의도를 분석하고 내적 복수를 하기 위해 미워하는 대신 실수할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갔다.


[첫주 총정리]


하루 평균 핸드폰 사용시간 1시간 16분. 퇴행했다고 자책한 날도 3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시작할 때 목표로 잡았던 하루 1.5시간 이하를 달성. 역시 한발 삐끗했다고 경주를 포기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전주 하루 평균 사용량 5시간 56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변화: 내가 이룬 성취가 자랑스럽다. 금식 이전의 증상(우울감, 불안초조, 공격성 증가, 허무감)들이 상당히 호전됐고, 보람, 행복감, 자신감이 느껴진다. 변화와 스트레스에 대처하기가 조금 쉬워졌다. '한 것도 없이 왜 이렇게 피곤하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더 많이 일해도 그만큼 피곤하지 않다. 실제 생활에 쓰는 에너지보다 부정적인 정신 상태와 공존하느라 쓰는 에너지가 훨씬 크다는 증거 아닐까. 증상을 인식하고 억누르고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줄줄 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는 별로 한 일이 없어도 빠른 속도로 방전될 수밖에 없다. 금식 이후로 나를 더 좋아할 수 있게 됐다.


[생각할 문제]

1. 언제까지 긍정적인 변화를 실감할 수 있을까? 50점을 70점으로 끌어올리는 건 쉽지만, 80점을 95점으로 끌어올리기는 어렵다. 높은 수준이 기본값으로 설정된 상태에서 추가로 뭔가를 개선하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 도파민 중독에서 벗어난 첫 주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상쾌했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2. 내가 핸드폰을 적정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절제하면서 정말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극단적인 방식 대신 적당히 즐기면서 지나치지는 않은 균형을 찾을 수 있을지. 일단은 2주차 금식을 마친 다음, 다시 즐기는 용도로 폰을 사용할 것인지 결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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