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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Oct 28. 2023

여행자의 정착

팬이 되는 것에 대하여

노래 하나를 좋아하는 것과 그 가수의 팬이 되는 것은 천지차이다. 당장 나만 해도, 꽂히는 노래는 기본 100번, 더 가면 1000번도 넘게 듣는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한발 더 나가, 그 가수의 모든 노래를 찾아 듣는 일은 쉽사리 일어나지 않는다. 대체 왜 그럴까. 그냥 한 곡의 노래로 나에게는 충분하니까. 이 세계가 충분히 안락하고, 그 너머까지 탐험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지 않으니까. 그래서 한 작품에 만족한 독자가 둘, 셋으로 넘어가는 일은 무척 어렵다. 내 기준으로 보면, 거의 기적처럼 희박하게 일어난다. 


지금 내가 팬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는 하루키와 테드 창, 악뮤, 싱숑. 싱숑은 조금 애매하다. 나는 그가 만든 '멸망 이후의 세계'라는 세계를 추종하지만, 그의 다음 세계인 '전지적 독자 시점'을 더 따라가지 않고 있다. 그 글이 내가 좋아하는 창작자가 온전히 끌고가는 것인지, 자본이 끌고가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솔직히 돈 냄새가 난다. 물론 그 사람이 그런 대박을 터트린 덕분에, 나처럼 세계 밖에 있던 사람을 멸이세로까지 인도할 수 있었다. 그 점에는 감사하지만, 그와 별개로 돈 냄새가 나는 세계를 순수한 마음으로 따를 수가 없다. 마치 내가 생업으로 글을 쓰던 시절처럼 까라면 까는 거다. 돈이 걸린 일이면 쓰는 거다. 그렇게 쓴 게 진짜로 좋은 기사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팬이 생긴다면 나와 테드 정도의 관계가 딱 좋을 것 같다. 나는 테드의 모든 작품을 읽고, 그의 세계에 깊이 공감하지만 사적으로는 아무 관심이 없다. 테드가 어떤 여자랑 사는지, 자식이 있는지, 어떻게 성장했는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그냥 그가 펼쳐보이는 세계가 나를 위안하고, 우리 사이에는 지하에 묻힌 파이프 같은 연결고리가 있다는 실감. 그거면 충분하다. 나와 하루키 정도의 관계가 되면 이미 약간 지나치다. 나는 하루키의 모든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그의 사생활도 궁금하다. 하루키와 사는 여자는 어떤 사람인지, 둘이 어떻게 연애를 해서 만났을지, 그런 남자와 함께하는 일상은 어떤 느낌인지, 자식은 왜 낳지 않는지 등등. 물론 그렇다고 머리가 돌아 하루키를 스토킹하는 지경은 아니지만, 반대로 누군가 나한테 이 정도의 팬심을 보낸다고 생각하면 역시 부담스럽다. 


나와 악뮤라면 어떨까. 이런 관계도 나쁘지 않지. 나는 그들의 작품 활동을 응원하고, 어느 정도의 사적인 감정도 느낀다. 떠올리면 약간 훈훈하고, 계속 잘 됐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 조용한 격려와 축복. 이건 내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의 실생활을 들여다봤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다. 하루키나 테드와 달리, 작품 외적으로도 나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실감 내지는 착각이 든다. 이것이 메시지와 배달부 사이의 상관 관계인지도 모른다. 현아의 연애스토리를 듣고 정감이 느껴지면서 평소라면 한 번 듣고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핑퐁'을 두세 번 더 듣게 되는. 이 마음은 상당히 장르적이다. 장르에서는 일단 배달부 - 캐릭터 - 에 빠지면 그가 주는 모든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팬심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 책을 팔고 싶다. 팬심 같은 거 없이, 그저 우리 사이의 파이프라는 실감에 의지해 내 작품을 찾는 사람. 내 글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얼굴을 맞대거나 친구가 될 필요는 없는 사이. 하루키가 말했듯이, 저 아래에서는 굵은 파이프로 연결됐지만 실생활에서는 서로를 몰라보는 사이. 


출간 이전에 내 작품을 칭찬해 주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개인적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들은 작품보다 나라는 인간을 먼저 알고, 거기에 호감을 가졌다. 고마운 일이지만, 나로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과연 그들은 중간에 놓인 나라는 다리 없이도 내 작품으로 가고자 할까. 그 다리가 사라지면, 그래도 여전히 나룻배를 구하거나 헤엄을 쳐서라도 내 세계에 닿고자 할까. 그 세계만이 내게 위안을 주니까. 그 세계에 가야 나는 자유로우니까. 외눈박이 나라의 두눈박이가 아닌, 정상인으로 활개칠 수 있으니까. 솔직히 아닌 것 같다. 그들과 내 작품 사이에서 내가 빠지면, 굳이 내 작품을 찾지는 않을 사람들이다. 그래서 조금 허망했다. 


- 넌 역시 단편이 잘 맞아, 네가 쓰는 단편은 최고야. 


어.. 고마운데, 내가 쓴 장편은 읽어 본 적이 없잖아? 나를 모르고 주는 칭찬은 공허하다. 넌 멋져, 넌 최고야, 인터넷에서 이런 문구를 본다고 그래, 난 멋져, 난 역시 최고야, 라며 삶의 의욕이 뿜뿜하지는 않는 것처럼. 정확히 이해받고 싶었다.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전혀 모르고 아무 관심도 없지만, 나라는 작가가 선보이는 고유세계에서 무언가 유의미한 것을 건져내는, 그런 팬을 만나고 싶었다. 


취향에 맞는 한 작품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작품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여행자의 정착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좋다. 이 세계를 이루는 모든 구성 성분이 알고 싶다. 그리고 설령 이 세계에 나와 맞지 않는, 내가 싫어하는 요소가 있다고 해도 받아들이겠다는 각오. 그건 마치 멸이세의 여캐들이 하나같이 빵빵한 가슴을 강조해도 내가 개의치 않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게 나를 환장하게 하는 요소는 아니지만, 약간의 거부감이 들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당신 세계에 머무를 거야. 그 세계를 온전히 포용하기로 결심했으니까. 내지는 테드의 불친절한 전개. 이걸 생략한 건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귀찮아서인지 분간이 안 가지만, 딱 여기에서 던지는 게 당신의 결정이라면 오케이. 당신이 토막 내서 던지는 부분이 생선 몸통이 아니라 대가리인 거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오케이. 주는 대로 받겠습니다. 몸통이면 땡큐하지만, 대가리면 대가리인 대로 내가 알아서 국이라도 끓여 먹겠다는 각오. 


그렇게 나와 개인적인 관계 없이도, 내 작품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그 파이프가 부디 나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든든한 지지대가 되기를. 내가 그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기를. 설령 실망하더라도 곧장 철거되지 않는, 견고한 구조물로 성장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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