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무도서관 탐방기, 소식지 5월호
흐린 일요일 오후, 아담한 이층 건물 앞에 차를 세운다. 황토색 벽돌 위에 붙은 궁서체 간판이 또박또박 인사말을 건넨다. 한인회관. 오른쪽에서 3번째, 청록색 문이 있다. 문 위에 자그마한 간판을 확인한다. TCKCC. 여기구나.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자 비탈길 같은 계단이 나타난다. 아이의 손을 잡고, 가파른 계단을 한 걸음씩 조심스레 오른다.
"엄마, 여기 애기 전등 있어!"
계단 양쪽으로 조롱조롱 늘어선 꼬마전구들이 발아래를 환히 비춰준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쩐지 이 계단 끝에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처럼 두근두근한 기분.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좁다란 입구가 무색하게 널찍한 실내 공간이 펼쳐진다. 생각보다 넓구나. 아이가 냉큼 소파로 달려가 몸을 던진다.
"와, 소파 엄청 커! 폭신폭신해! 엄마도 와서 앉아!"
성화에 못 이겨 나란히 앉는다. 포근한 밀크커피색 소파에 몸이 폭 파묻힌다. 쿠션감 좋네. 기지개를 켜느라 몸을 뒤로 쭉 뻗었더니 발판이 쑥 올라온다. 아이가 흥분해서 소리친다.
"어? 소파 변신해!"
"응, 리클라이너라고 하는 거야. 근데 나무야, 우리 조금만 조용히 하자. 도서관은 사람들이 책 읽는 곳이거든."
소파 맞은편 테이블에서는 바른 자세로 책을 읽거나 노트북 작업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서관 입구에 놓인 작은 화이트보드에 이메일과 인스타 주소가 있다. 얼른 사진부터 찍고, 인스타에 들어가 본다. 도서관 운영 안내가 나온다. 오늘은 사람 없이 무인 도서관으로 운영되는 날이다. 최근 포스트를 쭉 훑어보니 이런저런 행사가 많다. 파이낸셜 워크숍? 우리 진짜 돈관리 배워야 되는데... 이거 언제 하지? 글쓰기랑 미술 수업도 있네. 재밌겠다.
"엄마, 여기 게임 있어!"
아이는 어느새 화이트보드 오른쪽 책장 위에 보드게임들을 보고 있다.
"어머, 부루마블이 있네? 나무야, 이거 엄마가 어릴 때 하던 게임이다?!"
이게 언제 적 부루마블이야. 옛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진다. 도서관에서 책만 보는 게 아니라 게임도 할 수 있구나. 다음번엔 남편까지 데려와서 셋이 부루마블 한 판 해야겠다. 오랜만에 주사위를 던지고, 황금열쇠 뽑을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렌다.
도서관으로 들어가니 책장들이 즐비하다. 이게 도대체 몇 개야. 하나씩 세어보니 무려 14개다. 밖에 있던 책장까지 합치면 15개. 생각보다 규모가 크구나. 책도 많고. 정면 만화책 코너로 간 아이가 소곤소곤 말한다.
"엄마, 여기 마천도 있어!"
마법천자문? 정말이네... 40권도 넘게 있잖아. 아이가 유독 좋아했던 학습만화다. 한국에서 28권인가까지 읽고 캐나다로 오는 바람에 더는 못 봤는데. 그 옆에는 그리스로마 신화, 아래쪽에 WHY 시리즈도 있다. 3단 책장의 맨 아래 자리 잡은 건... 무려 신의 물방울 전집이다! 결혼 전에 이 만화를 보고 감명 받아 와인 테이스팅 행사에 갔다가 남편을 처음 만났다. 우리를 중매해 준 책을 이역만리 캐나다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엄마, 나 이거 소파 가서 봐도 돼?"
"그래."
아이는 마법천자문을 한 아름 안고 나갔다. 혼자 남아 조용한 도서관을 둘러보니 좋은 책이 참 많다. 강아지똥, 구름빵처럼 유명한 창작 동화는 물론이고 교과서에 실렸던 고전들, 삽화가 예쁜 그림책들에 이르기까지. 애들 책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성인 책도 책장 3개를 꽉꽉 채웠다. 박완서, 조정래, 한강, 신경숙, 황석영, 이해인, 권지혜, 정유정, 공지영 등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속에 꼬마전구가 하나씩 켜지는 것 같다.
일단 의자에 앉아, 아까 입구에서 찍은 사진을 열었다. 토독토독 자판을 두드려 이메일을 쓴다. 안녕하세요... 도서관 회원으로 가입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지만, 전하고 싶은 마음은 그 이상이었다. 캘거리에 한글책 도서관이 있다는 게 고맙고, 이렇게 좋은 책을 많이 모아둔 것도 고맙고, 오늘 우리에게 깔끔하고 아늑한 공간을 선물하기 위해 누군가 애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할 만큼 고맙다.
다시 인스타에 들어가 보니 봉사자를 찾고 있다는 포스트가 눈에 들어온다. 내친김에 디엠까지 보낸다. 급한 불부터 끄고, 느긋하게 기대앉아 신의 물방울 1권을 펼쳤다. 시즈쿠. 잇세. 오랜만이야, 반가워. 저녁 먹을 시간이 될 때까지 아이는 밖에서, 나는 안에서 각자의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집에 돌아가는 차에서 아이가 말한다.
"엄마, 도서관 너무 좋아. 우리 다음 주에도 또 오자, 응?"
"그래, 그때는 아빠도 같이 와서 게임도 하고, 회원 가입해서 책도 빌려가자."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는 와인을 한 병 열어야겠다. 우리 가족의 새로운 놀이터가 될 한나무도서관과의 만남을 축하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