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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 쓰는 마음 Sep 23. 2024

#3 키워드 글쓰기

- 내 인생의 모이스처라이저

글 쓰는 동지 여러분, 


어느덧 3번째 수업입니다. 3이라는 숫자는 작은 완결을 의미하죠.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세상에 어떤 일을 딱 한 번만 하고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사람은 있지만, 두 번을 한 다음 세 번째로 안 넘어가는 사람은 없다고요. 오늘 수업까지 글 3편을 내리 완성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쓰는 세계에서 작은 매듭을 지으신 것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꾸준히 매듭을 짓다 보면 매듭과 매듭이 연결되며 그물이 만들어집니다. 언젠가 우리가 위기에 처하더라도 바닥에 내리 꽂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안전망이 생기는 거죠. 


이번 주제는 '키워드 글쓰기'입니다. 아주 가볍고 자유로운 포맷이죠. 주제만 맞추면 형식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쓰는 세계의 '휘뚤마뚤템'이라고 할까요? 글을 쓴다고 하면 보통 표현에 있어 정제된, 내용에 있어 완결된 한 편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키워드 글쓰기는 그런 부담이 훨씬 덜합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가볍게 몇 줄만 써주셔도 완성되거든요. 가령 '가을'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려 볼까요? 

아침에 일어났더니 쌀쌀하다. 여름내 옷장 밑바닥에 잠들었던 수면잠옷을 꺼냈다. 위아래 한 벌을 다 입기엔 더워서 윗도리만 걸쳤다. 고양이들도 수면잠옷에 열광한다. 소파에 던져놓은 수면바지에 대고 신나게 꾹꾹이를 한다. 역시 따스하고 부드러운 게 제일이다. 그 좋은 수면 잠옷을 즐기려면 먼저 찬바람이 불어야 한다. 인생이란 균형. 좋은 게 얼마나 좋은지 알기 위해서는 안 좋은 것도 필요하다. 

키워드는 최근 유행하는 모닝페이지에도 적합한 주제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졸린다, 피곤하다, 쓸 말이 없다'만 적는 대신 미리 일주일치 키워드를 뽑고, 여기에 맞춰 써 보시면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 키워드를 굴려가면서 모닝페이지에 익숙해지면 좀 더 자연스럽게 무의식의 세계와 접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수업을 진행할 때, 수강생들이 미리 준비한 단어들 중 하나를 골라 모두 같은 키워드로 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동일한 주제에서 얼마나 다양한 결과물이 나오는지 확인하고,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면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였죠.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키워드로 일주일 쓰기' 프로젝트를 해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평소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이라거나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키워드를 주제로 매일 다른 글을 한 편씩 쓰는 겁니다. 겉핥기에서 벗어나 본질에 가까워지는 효과를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수업에서는 '기다림'이라는 키워드가 뽑혔습니다.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기다림의 여러 면모가 나왔는데요.

 

어린 시절의 즐거운 기다림 (ex. 소풍날을 기다리거나 연인을 기다림) vs. 성장한 뒤 인고의 기다림. 다양한 기다림의 형태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기다림의 개인적인 정의. 부모의 미덕으로서의 기다림. 


통제할 수 없는 기다림에서 파생되는 감정.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고 가슴 졸이는 기다림의 고통. 


두근두근한 기다림.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의 가슴 떨리는 기다림. 기다림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따듯한 주황색. 


아이를 기다리는 임신 과정. 아이를 만난 뒤에서 양육 과정에서 이어지는 기다림. 또한 세상에 나오기 위해 태내에서 자라는 아이의 기다림. 부모와 아이의 두 기다림이 서로 연결되는 순간. 


아래는 제가 쓴 예시작입니다. 다른 생각의 갈래 또는 여러분이 쓰신 작품도 댓글로 공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내 인생의 모이스처라이저


대학생이 된 다음,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갔다. 아마도 어느 교양수업의 과제였던 것 같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하는 어린이용 연극을 제외하면 인생 최초의 연극 관람이었다. 게다가 열연하는 배우들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무대가 가까운 소극장. 어찌나 설레던지 등받이도 없이 널빤지에 방석 하나 달랑 올린 옹색한 관객석마저 낭만적이었다. 드디어 불이 꺼지고 천지사방이 어둠에 잠긴 순간, 나는 마치 '유리가면'의 마야가 된 것처럼 가슴을 죄며 눈앞에 펼쳐질 신세계를 기다렸다. 마침 연극의 제목도 '고도를 기다리며'였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기다림은 대개 고통이다. 움치고 뛸 주도권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일이다. 그날 나는 3시간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연극을 보며 하염없는 기다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부조리한 일인지 절감했다. 이 희곡을 쓴 사뮈엘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관객들이 '부조리란 무엇인가'를 깨우칠 수 있도록 확실한 한 방을 날렸으니까. 극 중에서 고도를 기다리던 디디와 고고도 지칠 대로 지쳐 내일까지 고도가 오지 않으면 나무에 목을 매달자고 결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졸음과 사투를 벌이며 지켜보던 나는 내심 그들의 결의를 응원했다. 하지만 고도는 끝내 오지 않았고,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고도! 제발 올 거면 오던가, 안 올 거면 헛된 희망이라도 버리게 해 달라고!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든 기다림을 집어치우지 않을까. 모든 기다림은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밑도 끝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과정이다. 도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기다림의 시련이 주어지고, 기다림을 거쳐 충족되는 기대는 고생 끝에 낙이 된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언론고시 준비를 하다가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 터질 듯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집 뒷산을 뛰어올랐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캐나다 영주권을 받았을 때는 긴 터널을 벗어나 빛의 세계로 진입한 듯이 행복했다. 출판사들에 투고를 하고 간을 졸이다가 출간 계약 제안을 받았을 때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두 팔을 휘저으며 동네를 쏘다녔다. 그간의 모든 목표는 기다림으로 한껏 숙성됐기에 성취의 순간이 그토록 짜릿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취 없는 기다림은 무용한가? 목표 달성에 실패하는 순간, 애면글면했던 그간의 과정은 의미를 잃고 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기다림의 핵심이기에. 도박은 당연히 따야 제맛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도박중독자들의 뇌를 연구한 결과, 그들은 베팅에 실패해서 돈을 잃을 때도, 성공해서 돈을 딸 때와 마찬가지로 희열을 느꼈다. 딸지 잃을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패를 던지는 행위 자체가 쾌락의 원천이다. 따거나 잃거나 도파민이 펑펑 쏟아지니 뇌 입장에서는 언제나 이기는 게임을 하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도전하는 순간 이미 보상을 얻고 기다림에 중독된다. 기다릴 게 없는 삶은 지루하다. 고도를 기다리던 두 사람이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고도라도 기다리지 않으면 당장 목을 매야 할 만큼 무료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동안 기다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 내가 기다렸던 대부분은 이미 이루어졌다. 진학, 취업, 이직, 결혼, 출산, 이민, 다시 취업, 고양이 두 마리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걸 다 가진 나는 기다림의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그게 곧 행복은 아니었다. 기다림이 빠진 인생은 딱딱하게 굳어져 더 이상 내 마음대로 주무르고 모양을 바꿀 여지가 없어졌다. 가능성이라는 반죽이 마르지 않으려면 기다림이라는 물기를 더해야 한다. 사람을 괴롭게 하는 기다림의 수동성은 사실 능동성과 한 몸이다. 우리의 능동적인 결의는 애벌레와 같아 저 혼자서는 나비가 될 수 없고, 기다림의 고치에 들어가 번데기 상태를 지난 다음에야 날갯짓을 할 수 있다.


기다리는 고통이 기다릴 게 없는 고통보다 낫다면 무엇을 기다려야 할까. 새로운 기다림을 기다리던 나에게 초대장이 날아왔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여러 해를 겪어내며 당신의 모든 것이 응축된 글을 기다립니다." 신춘문예 공고였다. 나를 기다리는 세계. 꼭 들여보내 준다는 보장이 없기에 더더욱 아름답게 반짝이는 그 세계의 불빛. 어떤 합격 통지보다도 사랑스러운 초대에 나는 기꺼이 응답하기로 결심했다. 기다림이 시작되자 메마른 심장에 다시금 피가 돌고, 종점에서 만날 수도 있는 최선의 결과를 상상하면 요정의 가루를 뿌린 듯이 마음이 둥둥 날아오른다.


봄을 기다리는 특권을 누릴 수 있어 참 좋은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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