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을 선택하라
글 쓰는 동지 여러분,
이번 주제는 '좌우명 글쓰기'입니다. 저번 '나를 소개하는 글쓰기'와 이어지는 준비운동으로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쓰기 시동을 걸기 전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 위한 작업인 셈이죠. 나 자신은 가장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는, 편하고 익숙한 글감이 아닐까요? 생각은 글을 낳는데, 아무래도 남 생각보다는 내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살기 마련이니까요.
좌우명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것을 떠올리고 부담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하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주제가 무겁다고 느껴지면 손을 움직이기 힘드니까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주세요. 좌우명의 원래 뜻대로 '인생의 지침으로 삼은 문장'이 있다면 거기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런 게 없다면 내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남한테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살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에서 '선량'이라는 키워드가 나옵니다. 이걸 문장으로 단순화하면 '착하게 살자'는 좌우명이 되겠죠.
아직 인생 전체를 포괄할 만한 개념을 못 찾았다면, 일단 경험이나 독서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떠올려 보셔도 좋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제가 읽고 있는 'The power of habit'이라는 책에는 페브리즈 관련 일화가 나옵니다. 페브리즈는 애초에 고성능 탈취제로 개발됐지만, 마케팅팀은 좀처럼 이 제품을 팔지 못하고 고전했다고 해요. 정작 페브리즈가 꼭 필요한 고객층은 악취에 익숙해진 나머지 냄새나는 자기 집에 페브리즈를 뿌려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죠.
마침 이 내용과 연결되는 개인적인 경험도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집단의 자체평가 결과를 취합하는 일을 했는데요. 각 항목별로 자신의 능력치를 직접 판단해서 1-5점 사이의 점수를 매기게 했어요. 그러자 매사에 불성실하고 프로젝트 기여도가 낮은 A가 거의 모든 항목에서 스스로에게 만점을 주는 황당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게다가 인성 문제로 구설이 자자한 B는 자신의 인간관계 능력에 자신 있게 5점을 매기고, 심지어 장점을 묻는 주관식 문항에는 '솔직하고 뒤끝 없는 소통 능력'이라고 적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A 또 회의 안 왔어? 이메일 답변도 아직이야? 늘 이런 식이지"라고 말하는 A는 자기가 최고의 능력자인 줄 알고, "오늘은 B가 성질 안 부렸어? 아, 회의 안 왔다고? 다행이네"라는 평가를 받는 B는 본인이 인간관계의 귀재인 줄 아는 모순이 참 놀랍지 않나요? 이 2가지를 엮으면 '인간의 자기객관화는 지극히 어렵다'는 교훈이 나오고, 여기에서 '치열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좌우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좌우명/핵심문장을 잡았다면 생각의 잔가지를 쭉쭉 더 뻗어보세요.
1. 내가 이 좌우명을 갖게 된 계기
2. 실제 좌우명대로 실천했던 경험 및 사례
3. 내 방식대로 좌우명 해석하기
ex.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잡아 먹힌다 -> 남들이 가라는 대로 무작정 뛰는 대신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게 맞는 방향성을 설정하는 게 중요하다.
이밖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가 가능하겠죠. 제가 쓴 예시작은 아래와 같습니다.
고통을 선택하라
행복이란 늘 잡히지 않는 화두였다. 사람이 어떻게 맨날 행복하나, 무리하게 매일 행복해야 할 필요가 있나, 라고 하면서도 실은 행복하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하나하나 곱씹어보고, 이렇게 많이 가졌는데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지, 그럼 뭘 더 가져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했다. 그렇게 행복을 고민할수록 더 고통스러워졌다. 왜 안 행복한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를 떠올리는 것부터가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건 매 순간 스스로의 귓전에 대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넌 행복하지 않아! 뭐라도 좀 해 봐! 언제까지 이렇게 불행하게 살 작정인데!
그즈음, 조 디스펜자를 알게 됐다. 사람들이 왜 불행한지에 대한 그의 진단은 통렬하고 예리했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현재를 살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다. 가령 오늘의 나에게 불쾌한 일이 일어났다. 사무실에 출근했더니 부장이 씩씩대면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을 이 따위로 하느냐며 서류 뭉치를 내던졌다. 물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나는 하루종일 충격 속에 살다가 집에 가서도 계속 그 생각을 한다. 부장의 폭언과 죽은 새처럼 발치에 떨어지는 종이들과 지켜보던 이들의 경악한 눈빛, 속닥거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때마다 나는 다시 과거로 소환된다. 뇌는 내가 지금 이 순간 그 일을 겪고 있는지,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아드레날린을 펑펑 쏟아낸다. 뇌의 비상신호를 수신한 육체는 공격을 맞받아치거나 달아나기 위한 방어기제를 발동하고, 나는 한밤중에 이불을 차 던지며 벌떡 일어난다. 이렇게 트라우마가 형성된다. 과거의 고통을 현재로 끌고 와서 수십, 수백 번을 다시 체험하며 신체를 비정상적인 각성 상태로 몰아넣는다. 몸과 마음이 배겨 날 도리가 없고, 성장의 물꼬가 틀어막힌다. 그 일이 일어나고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10년 전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디스펜자의 답은 과거와의 연결을 끊고 현재에 존재하기 위해 명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명상은 점점 스케일이 커져서 ‘나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그걸 가지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순간 우주가 나를 위해 준비한 다양한 선택지에 제약이 걸리기 때문에, 나는 이미 가졌다는 만족과 기쁨 속에 살아가면서 실제적인 작업은 그저 우주에 맡기라는 것이다. 그의 진단을 신뢰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아무래도 이건 정신분열증으로 가는 쉽고 빠른 길 같았다. 나는 당장 다음 달 렌트비가 없지만, 우주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오늘 친구들을 불러 모아 저녁을 쏘라고? 나는 이미 부자라는 걸 뼛속까지 믿으며 부자가 된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그의 가르침을 내면화하기는 어려웠다.
디스펜자 행복론의 모순에 발목을 잡혀 주춤하던 중, 새로운 스승이 나타났다. ‘도파민 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 이 책에는 행복을 찾으려고 발버둥치다 중독의 늪에 빠진 환자들의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는데, 행복하기 위해 모든 고통으로부터 달아나 쾌락만 누리고 산 사람들은 적당히 고통을 참으면서 사는 사람들보다 더 지독한 불행에 곤두박질쳤다. 애나는 your choice of drug/pai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의 도피처가 있다. 어떤 사람은 게임을 하고, 어떤 사람은 유튜브를 보고, 어떤 사람은 쇼핑을 한다. 하지만 어떤 약이라도 남용하면 뇌의 보상체계가 망가지면서 점점 더 강도를 높여야 간신히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중독된 이후에는 약을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약을 안 하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답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에 있다. 정확히는 쾌락과 고통 사이 균형의 회복. 인생에서 고통을 제거하려고 쾌락의 스위치를 누르면 뇌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통 쪽에 무게를 추가한다. 원하는 대로 하루종일 유튜브만 실컷 보고 뒹굴었는데 저녁이 되면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고통의 스위치를 누르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행복의 무게추가 내려간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선택해야 한다. 어차피 고통을 배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고통을 선택해야 할까. 좀 더 가치 있는 고통, 그 고통을 참고 견뎠을 때 더 큰 보상이 주어지는 고통을 골라야 한다. 겨울 새벽, 따스한 침대를 벗어나 출근길에 오르는 것은 고통이다. 회사에서 잘리고 노숙자가 되어 길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고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더 상위 고통인 출근의 고통을 선택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고통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게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의 의미, 이 고통을 지불함으로써 주어지는 보상을 알고 기꺼이 고통을 수용할 때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온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가시밭길이자 무릉도원인 글쓰기를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