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백악관 삼국지

I alone can fix it 감상문

by 읽고 쓰는 마음

제목은 It makes me look weak로 붙이는 게 더 나았을 듯. 가오가 뇌를 지배하며 남들한테 약해 보이는 건 못 참는 트럼프. 하지만 누군가 어떤 평가를 피하기 위해서 발광을 한다는 건 그게 최대 약점이라는 뜻이다. 실은 약하기 때문에 약해 보이는 걸 참지 못한다. 내가 강하고, 그걸 마음 깊이 확신할 수 있다면 약해 '보이는' 거엔 신경을 덜 쓸 테니까.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의 모토 역시 마찬가지. 위대함이 언제부터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주의였나. 트럼프가 MAGA를 외칠수록 미국은 선을 수호하는 영웅에서 점점 멀어져 짜치는 양아치로 전락한다.


트럼프도 트럼프지만, 제일 큰 문제는 한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대통령제 같다. 한 사람이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으니까 참모진이 필요하고, 어떤 얘기인가 보다 누가 전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특정한 메신저를 거치면 중요한 메시지가 왜곡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거의 중국 황제를 농락하는 십상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백악관 삼국지'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면성을 지닌 입체적인 존재다. 가령 트럼프 참모 Azar는 트럼프의 꼭두각시라고 욕을 먹지만, 코비드 사태와 관련해 의사들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이걸 트럼프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검찰총장 Bill Barr는 정치적이라는 비난을 듣지만, 자국민에게 군대를 보내는 건 절대 안 된다고 버틴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 부통령 펜스도 '지금 나서면 정치적인 희생양이 된다'는 참모의 만류에 내 할 일을 하겠다고 답한다. 트럼프조차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인간적이고 매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인간은 100% 나쁘거나 좋지 않고 이런 식으로 섞여 있다.


기자들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썼다고 강조하는 책 치고는 군데군데 사심이 느껴진다. 딱히 부정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없는 대목에서도 이미 트럼프에게 너무 빡쳐 있다는 게 명백하다. 인간적으로 이해는 가지만 이럴수록 설득력과 객관성이 떨어진다. 적을 몰락시키고 싶으면 굳이 나서서 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가만히 두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사실만 보여줘도 충분하니까. 이렇게 극혐하던 반대 진영이 이번 트럼프 재선으로 얼마나 낙담했을지 딱한 마음도 든다.


트럼프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됐다기보다는, 정치판이 어디나 똑같이 더럽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어떻게든 버티려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건 그들의 분투 덕분이다. 사실 책 초반에는 트럼프에 대한 비난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요직을 자기 사람들로 채우고 반대 세력에 복수하는 건 정치인들의 기본 아닌가? 하지만 코비드 데이터를 왜곡해서 가짜 리포트를 만드는 것부터는 선을 넘었다.


이 책을 읽고 국제 정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과 좌충우돌 행보의 숨은 의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왜 전쟁을 하게 됐는지, 어떤 역사적 배경과 맥락이 있는지 등을 좀 더 이해하게 됐다. 트럼프의 가장 큰 해악은 '이래도 되는구나'라는 도덕적 해이를 정상화하는 데 있다. 가식적으로나마 인류 평화와 공동 번영을 추구하려던 시기가 끝나고 '어쩌라고, 나 손해 안 볼 거야, 돈 안 내면 동맹이고 나발이고 없어, 기후협약? 너네끼리 해. 내 전쟁이냐?' 같은 얘기를 노골적으로 내뱉는 천민자본주의가 전면에 나섰다. 실상은 언제나 그랬겠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감추려 하고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이젠 체면치레조차 하지 않는다. 혼란의 시기,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스트롱맨끼리 맞붙으면 치킨게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겠지.


캐나다는 어디로 갈까. 난 아직 여기 사람들이 인간 존중과 다양성 등의 상위 가치를 추구한다는 걸 믿고 있는데, 그런 캐나다 역시 휩쓸리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