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를 넘어 인간 박정민을 만나다.
요즘 배우 박정민이 나의 알고리즘에 유난히 자주 스친다. 비록 그는 2025년 청룡영화상에서 수상까지 하진 못했지만, 화사와 함께 쏘아 올린 그날의 축하 공연으로 인해 단숨에 '올해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여기도 박정민, 저기도 박정민. 여기저기서 회자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일었다. 나만 알던 그의 매력을 이제는 온 국민이 다 알아버린 것 같아서, 마치 조용히 즐기던 동네 단골 식당이, 어느 날 방송을 타고 이제는 줄을 서야만 먹을 수 있는 전국구 맛집이 되어버렸을 때의 그 복잡미묘한 감정이랄까.
그런데도 나는 그 변화가 싫지만은 않았다. 내가 아끼는 배우가 더 넓은 무대에서 빛나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니까.
사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연기를 사랑해 온 팬이다. 하지만 팬심으로도 넘기 힘들었던 장벽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가 쓴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이었다.
알게 모르게 나는 '연예인 저자'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서점가에 쏟아지는 수많은 에세이 중 일부는 화려한 이름값에 기대어, 깊이 없이 가볍게 쓰인 글이라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배우로서의 박정민은 애정했지만, 작가 박정민의 책은 굳이 찾아 읽고 싶지 않았던 것도, 굳이 실망감을 맛보고 싶지 않은 나의 방어기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 종이책으로는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도 힘든 그 책이, 전자책과 오디오북 시장에서 역주행을 시작한 것이다. 밀리의 서재 종합 순위 3위. '대체 어느 정도길래?'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무엇보다 저자인 박정민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낭독했다는 오디오북라니. 이건 팬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일단 운동을 하면서 가볍게 들어보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기대는 여전히 바닥이었다. 내가 나름 그의 팬이긴 하지만, 그건 배우로서의 그를 애정하는 것이고, 작가로서의 면모는 또 다른 거니까.
그렇게 애써 깐깐한 척, 고고하게 러닝머신 위에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박정민 본인도 초반엔 아주 담담하게, 마치 대본 리딩을 하듯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그도 스튜디오라는 공간에 적응한 것인지, 자신의 글에 완전히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뻔뻔하게 너스레를 떨다가도, 어느 순간 찌질할 만큼 솔직한 속내를 툭 내뱉었고, 다시금 자조적인 유머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이건 단순한 낭독이 아니었다. 아주 끼를 부리며 연기를 하는데, 그의 농익은 연기에 나는 자꾸만 풉 웃음이 터지고, 올라가는 입꼬리도 주체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 책을 텍스트로만 읽었다면 어땠을까? 아님 다른 성우가 이 책을 낭독했더라면? 어쩌면 조금은 투박한 문장이나 정제되지 않은 표현에 나는 엄격한 잣대부터 들이댔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닌 그 어떤 누구도 절대 이 맛깔나는 분위기를 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책은 화려한 미사여구나 거창한 인생철학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동안 스크린 뒤에 숨겨져 있던, 불안해하고 흔들리는 한 청춘의 민낯이 있다.
양파처럼 까면 깔수록 새로운 매력이 드러나는 사람. 배우 박정민이 아닌, '인간 박정민'의 고유한 매력이 활자를 뚫고 목소리로 전해졌다.
팍팍한 일상에 건조한 위로보다는 '피식' 터지는 실소와 공감이 필요한 분들에게 이 오디오북을 권하고 싶다. 팬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팬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다만, 공공장소에서 들을 땐 특히나 주의할 것. 나처럼 혼자 키득거리다가는 옆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흘끗흘끗 쳐다보게 될 테니까.
나만 알고 싶던 박정민 배우는 이제 모두의 별이 되었다. 하지만 이어폰을 통해 1:1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만큼은, 그는 여전히 나만의 친밀한 스토리텔러다.
당분간 이 기분 좋은 '박정민 앓이'는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