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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Jan 16. 2021

파리의 에밀리, 유럽의 비유럽인을 위해 만들어진 드라마

전지적 비非유럽인 시점의 드라마 속 킬링 포인트




파리의 에밀리에게 프라하의 소피가.


얼마 전 친구가 추천해준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원제 Emliy in Paris)를 보았다. 처음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보기 시작했는데 한편에 삼십 분 남짓되는 생각보다 짧은 러닝타임이 나를 더 감질나게 만들었고, 결국 아껴보고 싶은 욕심과 너무 재밌어서 참을 수 없는 다급함 사이에 고뇌를 하며 이틀에 걸쳐 시리즈를 전부 끝내버리고 말았다. 이 드라마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무한 긍정 에너지를 가진 미국인 아가씨가 파리에서 살아남아 마침내 그곳의 일부가 되는 이야기'.


파리에 도착한 첫날, 앞으로 살게 될 건물로 들어서다 마주친 노부인에게 Hi! 하고 경쾌한 인사를 건네는 에밀리. 그런데 이 노부인이 영어로 인사하는 그녀를 훑어보는 눈길이 어딘가 익숙하다. 바로 체코에 처음 살면서 나를 주눅 들게 했던 체코인들의 그 눈빛 아닌가!

네 정체가 뭐냐?라고 묻는 듯한, 내가 이방인이란 걸 상기시키려는 듯한 그 경계 가득한 눈빛 말이다. 그렇게 첫 화가 시작된 지 5분이 채 안되어 나는 에밀리에게 전적인 감정이입을 완료해버리고 말았다.

                    ©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이 눈빛을 받고도 주눅 들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프라하에 혼자 사는 내가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이 넘어갈 뻔했던 건 파리의 압도적인 아름다움도 아니고 에밀리의 럭셔리 패션이 주는 부러움도 아니었다. 심지어 엄청나게 섹시한 남자들(사실 조금 숨 넘어갈 뻔했다.)도 화끈한 베드신도 아닌 바로 미국인, 아니 비유럽인(Non European)인 주인공 에밀리가 유럽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에밀리의 모습은 처음 유럽살이를 시작했을 때의 내 모습과 꼭 같아서 나는 어떤 장면에서 에밀리 대신 얼굴을 붉히다가도 올챙적 생각은 못하는 개구리처럼 에밀리의 서툰 실수들에 구경꾼처럼 웃어댔다. 나는 파리지앵 친구들이 에밀리의 행동에 "오 노(Oh no)" 하고 질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을 때 '나만 저랬던 게 아니었네!' 하며 위안을 받았고, 그들이 "저게 뭐 어때서?" 하고 에밀리의 반응에 의문을 제기할 때 나는 '나만 이상하게 생각한 게 아니었어!' 하며 에밀리 편을 들었다. 동병상련의 그녀와 함께 동질감을 느끼고 그녀에게서 나를 보았다.


프랑스엔 아직 가보지도 못한 내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보며 미국인 아가씨에게 동질감을 느끼다니, 분명 비유럽인이 느끼는 범유럽적인 공통된 특징들이 있음에 분명하다. 이쯤 되니 나와 같은 유럽의 모든 에밀리들에게 묻고 싶어 졌다. "에밀리와 나만 이런 건 아니죠?"




산다는 것, 유럽의 집 이야기.


웰컴 투 아날로그 월드!


유럽에서 산다는 건 곧 한국인에겐 당연하던 많은 것들과의 이별을 뜻한다. 주로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들을 놓아주어야 하는데, 이때 미련을 훌훌 털고 유럽과 한국은 다르단 사실을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머지않아 매일마다 투덜거리는 못난 자신을 보게 될 확률이 높다. 사실 내 경우엔 유럽에 살기 전 여기보다 열악한 인프라와 느린 속도를 가진 나라들에서 살아보았던 터라 대부분의 불편함 들은 거뜬히 넘길 수 있었지만 아직도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온 직후엔 같은 시대를 다른 속도로 달리는 두 세계의 간극을 체감하고서 놀라곤 한다. 어느덧 유럽 생활 5년 차, 이곳의 생활에 대해 사람들이 물어올 때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유럽은 불편함을 낭만과 맞바꾼 세상'이라고.



1. 노(No) 엘리베이터 혹은 노(老) 엘리베이터.


©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4층이라던 그녀의 집이 사실 미국식 '5층'에 해당한단 사실을 알게 된 에밀리는 첫 번째 문화 차이를 발견한다. (물론 그 덕에 멋진 아랫집 남자 가브리엘과 안면까지 트게 되고 말이다.) 유럽에서, 그것도 회사나 상업적 건물이 아닌 가정집으로 쓰이는 건물들에선 엘리베이터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별로 놀랍지 않은 존재다.


숙박 예약 사이트에서 유럽의 숙소들에 관련된 후기에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 중 하나도 바로 엘리베이터인데,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 꼭대기 층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올라가야 했다던가, 생전 보도 못한 구식 엘리베이터의 생김새와 그 둔한 움직임에 겁을 먹었다는 여행자들의 후기가 즐비하다. 그래서 나도 숙소를 예약할 일이 생기면 꼭 객실 내부의 사진뿐 아니라 시설에 대한 설명과 후기들을 꼼꼼히 살핀다. 그래야 여행 당일 엘리베이터가 없는 옥탑방에 머물게 되는 상황만큼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같은 유럽에서도 건축법에 따라 엘리베이터가 흔한 곳도 있겠지만, 내가 사는 체코는 드라마 속 파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일정 높이(약 5층) 이하의 건물에는 엘리베이터 설치 의무가 없어 집을 보러 다닐 때면 하루에 수십 번 계단을 오르내리곤 했다.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없는 고층 매물의 경우 집세가 저렴한데, 가끔 집주인이 곧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될 예정이라고 귀띔을 해줄 때도 있다. 물론 유럽에서 '예정'이라 함은, 기약 없는 공사 기간이 동반된 불확실한 계획일 뿐이지만 말이다.



2. 무거운 문짝.


©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첫 출근을 마치고 돌아온 에밀리. 대문을 미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온몸으로 힘껏 밀어야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또 혼자 킬킬거렸다. '맞아, 저거지.' 100년 이상의 나이를 가진 대부분의 집들은 말 그대로 육중한 대문이 버티고 서있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나 또한 그걸 밀고 들어갈 때면 낑낑대곤 했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사는 집은 1678년에 지어졌는데, 건축 당시 지은 200살 넘은 계단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프라하 구시가지에 위치한 건물이다. 마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높게 만들어진 문은 두께도 10센티는 족히 되어 보여서 매번 문을 열 때면 손이 아닌 온몸을 기대어 힘껏 밀어야만 한다. 가끔 주차를 할 일이 생기면 같은 도로 위를 달리는 트램을 살피랴, 무거운 문을 양쪽 다 열어젖히랴, 차가 안전하게 들어온 후 다시 문을 닫으랴 아주 진이 쏙 빠진다. 그래도 그 거대한 크기와 두께 덕에 문을 닫고 나면 바깥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어 고요함이 흐르는데,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막 걸어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뛰어난 방음 기능만큼은 인정해야겠다.


 3. 자동센서 따위는 없는 계단


늦은 밤 건물로 들어서면 정말이지 화면처럼 그야말로 '암흑'이다.©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사실 사람이 들어오면 반짝하고 켜지는 똑똑한 자동 조명도 유럽에선 당연한 존재가 아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온 에밀리도 깜깜한 건물 안에서 겨우 불 켜는 스위치를 찾아낸다.

한 번은 조명 스위치를 딸깍하고 눌렀는데 불 대신 이웃집 현관문이 열렸다. 조명 버튼과 초인종 버튼의 모양이 같은데 내가 주의 깊게 보지 못한 탓이었다. 꽤나 민망하고 미안했던 경험인지라 그 이후엔 친구네 집에 갈 때도 건물 내 버튼에 혹시 작은 이름이 쓰여 있지는 않는지 필수적으로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이후 한 지인은 나처럼 이웃집 초인종을 잘못 눌렀다가 그 집의 잘생긴 남자랑 데이트하는 사이가 되었다. 부럽다. '되는 놈은 엎어져도 금가락지'라더니.



4. 층간소음? 유럽은 벽간 소음 + 층간 소음.


©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그 와중에 여유로운 까미유의 미소는 새삼 놀랄 일 없는 일상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에밀리가 샌님 애인과 뜨거운 밤을 보낼 때. 그들의 목소리와 삐걱대는 가구 소리까지 아래층 이웃 가브리엘과 여자 친구 카미유에게 생중계된다. 아, 유럽에 산다면 절대 피할 수 없는 게 바로 층간/벽간 소음이다. 그리고 이 장면이 절대, 절대 과장된 게 아니란 거다.

내 유럽 생활의 시작은 바르셀로나였는데, 하루는 자려고 누운 내 귀에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이고 소리의 출처를 찾았더니 바로 함께 살던 플랫 메이트 커플이 그들의 방에서 열심히 사랑을 나누는 소리였다. 나는 놀란 마음에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얼른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음량을 최대로 높인 음악을 들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더랬다.

이후 유럽 생활 5년 차에 다다르는 지금, 이제는 한밤 중에 어디선가 소리가 들리면 그러려니 한다. 윗집 영국 남자인지, 아랫집 커플인지 야밤의 소음이 들려오는 방향에 따라 소리의 발원지까지 알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옆집에 칠십 대의 나이 지긋한 노년 부부가 산다는 것. 위아래 옆 중 최소한 한 면이나마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우니 얼마나 다행인지.

종종 미래에 자녀가 생기고, 아이들이 이런 종류의 소음의 정체를 물어오는 상상을 해볼 때면 머리가 아찔해지곤 한다. 한국에 비해 성적으로 개방적인 사회인 데에는 그들의 주택구조가 분명 한몫을 했을 거다.



5. 정전? 물 끊김? 새삼스럽긴!


© 2020  Emily in Paris, Netflix.  all rights reserved.

에밀리가 샤워를 하다 물이 끊긴다. 며칠 전 미국에서 가져온 딜도(여성용 자위기구)를 사용하려다 전압이 다른 기기를 꽂는 바람에 건물 전체에 정전을 내버린 장본인이었기에 주인아줌마는 외국인이 와서 별 사고를 다친다며 눈알을 굴려댄다.(맘에 안 들 때마다 눈알 굴리기, 여기 체코 사람들의 주특기이기도 하다.) 가브리엘은 수백 년 된 건물에서 노후한 파이프와 각종 설비로 인해 이런 일은 굉장히 잦은 편이라며 에밀리를 위로한다.


얼마 전 우리 동네에서도 상수도관이 터져 예고도 없이 저녁에 물이 똑 끊겨버렸는데, 반경 700미터의 모든 집들이 모두 단수가 된 심각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늦은 밤이니 내일 오전쯤엔 다시 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12시간이 지나도 수도꼭지는 잠잠했고, 대신 골목마다 임시 물탱크가 도착했다고 했다. 사람들은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물을 담을 수 있는 용기는 죄다 들고 나와서 물을 받아갔다. 나도 허겁지겁 집에 있는 병들을 챙겨 물을 받아왔는데, 그날 상수도 공사는 오후 9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한국이었다면 아마 민원 폭주에 '늑장대응'으로 아홉 시 뉴스에 나왔겠지만 어쩌나, 나는 체코에 살고 있는데. 그저 이들의 느긋함을 이런 식으로 배워가는구나 위안 삼을 뿐이다.


*해당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 견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글입니다. 유럽의 각 국가는 기후, 민족 등 여러 배경에 기반한 고유문화와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국가들을 하나로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글의 맥락과 편의상 비유럽인의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느끼는 범유럽적 특성들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화하여 '유럽'으로 통칭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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