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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Jan 25. 2021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비가 오는 날이면

[골목의 작은 사자들 네 번째]




모처럼 쉬는 날, 휴일만 되면 무거워지는 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동안 벼르고 있던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방대한 소장품 덕에 두세 시간으론 택도 없다는 말을 듣고선 몇 달째 방문을 미뤄오던 참이었다.


박물관에 가려면 귈하네 트램역이 훨씬 가깝지만, 아야 소피아와 블루모스크를 보는 눈호강을 포기할 수 없어 한 정거장 전인 술탄 아흐멧 역에 내렸다. 눈과 비가 섞여 내려앉은 돌길은 촉촉이 젖어 반들거렸고, 군밤과 옥수수를 파는 리어카에서는 차가운 공기를 뚫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살면서 이스탄불처럼 아름다운 도시를 본 적이 없다. 저마다의 매력으로 내 마음에 남은 여러 도시들을 사랑했지만 이스탄불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동안 몰락했던 제국들의 건물과 유물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듯 생생한 기운을 내뿜는 곳이 바로 이스탄불이었다. 아마도 그건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힘찬 생명력이 도시 곳곳에 넘치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하곤 했다.


이승훈의 비 오는 거리를 들으면서 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사실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걸었다기보단 매일 지나다녀서 이제는 눈 감고도 걸을 수 있는 길 위로 두 발이 나를 이끌었다고 해야겠다. 어느새 고고학 박물관 입구에서 발걸음이 멈추었고, 야외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정원 들어섰더니 날씨탓인지 어떤 기척도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혹시라도 한국어로 된 도록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실내 입장을 하기 전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보려던 찰나, 가게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작은 털 뭉치와 눈이 마주쳤다.



채 마르지 않아 쭈뼛쭈뼛 뻗은 털인데도 그 보드라움이 유리문 너머로까지 느껴지던 녀석은 내가 문을 밀고 들어가려 하자 유유히 가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뒤따라 들어가자마자  쳐진 광경에 나는 가게에 온 이유도 잊은 채 그곳의 직원들과 마주 웃고 말았다. 



볕이 좋은 날이라면 유유자적 박물관 안뜰을 걸어 다녔을 녀석들이 추위와 비를 피해 기념품 가게 안 와있었다. 그것도 버젓이 판매 중인 상품들 위로 자리를 차지하고서 말이. 터키에서라면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광경이지만 그럼에도 매번 이런 광경들은 그날 하루 전체를 두고두고 미소 지으며 억하게 하는 특별한 마법을 가지고 있다.


구불거리는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직원이 말했다. "항상 이래요. 비가 오면 여기로 몰려와 문 앞에서 다 같이 야옹거리죠. 문을 열어주면 각자 맘에 드는 자리를 골라잡고서는 털을 손질하고, 잠이 들거나 우리에게 와서 애교를 부려요. 그러면 또 가게에 들어온 손님들은 이 녀석들에게 온통 관심을 빼앗겨서 박물관에 들어가는 것도 잊고 한참을 놀다가죠, 지금 당신처럼요."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답했다.

"어느 누가 이렇게 따뜻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두고 박물관의 석상들을 향해 발걸음을 돌릴 수 있겠어요. "






+

해가 좋은 날엔 이렇게 박물관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유물들 위에서 일광욕을 하는 녀석들을 만날 수 있다. 한때는 한 신전을 떠받치고 있었을 기둥머리가 지금은 고양이들의 일광욕 장소라니, 다음 생에는 터키에서 고양이로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또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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